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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n 14. 2024

고유동


전직 지원 교육에 입교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퇴직 예정자. 다음 직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별로 들어오고 싶지 않았으나, 필수교육이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빼고 모두 초롱초롱하다. 강사의 정보에 펜을 쥔 손이 빠르게 춤추고, 강사의 입에 모든 시선이 고정된다. 예로부터 딴짓으로 유명했던 나는 이런 심각한 자리에서도 엉뚱한 상상을 하기 바쁘다. 이를테면 앞에 선 강사만 사라지게 하는 일, 모든 사람이 바라볼 대상은 없는데 시선을 어디엔가 고정한 채, 손만 부지런히 움직이는 기괴한 장면이 탄생한다. 인간의 눈은 무언가를 바라보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그 존재 자체로 없던 것을 보려 애쓰는 기관이기도 하다. 가시광선이 닿을 수 없는 어느 공허에 그들의 시선이 방황한다. 마치 그들의 상황과 닮았다.

 

직장을 생각한다. 밥벌이를 위해 필수적인 장소. 인간이 존재를 증명하는 곳. 직장이 없어지는 일은 생존에 위협이 되는 중대한 일이고, 인간관계의 정교한 그물망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릴 수 있는 심각한 사태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장생활을 갈망하기 마련이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주는 안정감. 안정적인 관계의 그물. 사회적 위치. 명함 한 장이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증명이 가능한. 어떤 평화. 일종의 천국이다.


이런 맥락에서 직장에 들어가는 일은 천국으로 입장하는 문을 통과하는 일이다. 대학 입시가 그러하듯. 모든 노력이 ‘문’을 통과하는 일에 집약된다. 문은 작으므로 몸은 압축되고 압축되어 밀도가 높은 어느 하나의 점이 되어버린다. 어느 날 점은 문을 통과하고. 압축된 몸은 요요현상이 찾아온 다이어터처럼 원상 복귀된다. 대학 입시가 그러하듯,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는 예리함을 잃어버리고, 밀도를 망각한다. 점은 공이 되고. 공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기압이 낮은 허공 어딘가에서 빵 터지고야 만다. 오직 표피만이 남아 허공에 부유한다. 한때의 노력은 그렇게 산산이 조각난다. 흔적만 남긴 채.


나는 바란다. 문에 들어가지 않고도 밀도를 유지하기를. 기압이 없는 곳에서도 존재를 유지하기를. 세상과 발맞추어 함께 나가되, 색깔만은 유지하기를. 이 기이한 갈망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거의 이십 년을 퍼즐 한 조각으로 살았기 때문일까. 퍼즐은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 그것은 대체할 수 있기에 슬프다. 톤(ton)을 구성하는 그램(gram)의 삶. 그램은 무언가 하지만, 쌓이지 않고 바스러진다. 그램의 의견은 톤에게 있어서 백만 분의 일의 가치일 뿐이다. 그램이 사라져도 톤은 유지된다. 그램의 회의(懷疑)는 짙어지고. 수십 년간 내면의 변증법에 시달리다가 결국 각성한다.


나는 동굴 밖으로 나가서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 나는 플라톤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전체성 가운데 안온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므로. 아니 애초에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므로. 내가 그들의 자유와 행복을 논할 입장은 아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동굴 밖에 있는 지금의 상황이 참 즐겁다. 가시광선이 닿는 곳곳에 색채가 피어오른다. 동굴 속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 지금 내 앞의 강사는 사람들에게 동굴 속 삶을 설파한다.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들. 내가 가야 할 길은 그곳에 없다. 애초에 자신의 길은 결국 자신이 만드는 것 아니었던가. 개척하고 뚫으면서. 그 과정에서 기이한 것이 싹튼다. 동굴 밖에 있음에도, 또 다른 변화를 꿈꾸는 나.


껍질을 벗어던졌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무언가를 바라는 갈망. 비정상이다. 지금의 나는 확실히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변했다. 글을 창조하는 즐거움은 펜타닐의 중독성을 가뿐히 뛰어넘는 마약이다. 게다가 부작용조차 없는 완벽한. 그것은 이를테면 손댈 곳 없는 예술작품이다. 그런데도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유일무이(唯一無二)를 향한 갈망 때문이다. 마음에 갈망이 잉크처럼 퍼져나간다. 갈망은 이내 집착이 되고. 집착은 끈적하게 얽히고설켜. 결국, 튼튼한 철창이 된다. 나는 다시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생각한다. 어떤 ‘고유성’의 획득. 그것은 정지가 아닌,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멈춤이 아닌, 활동에서 태어난다. 필연적으로 영원히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과정’에서 성취되는 것이므로. ‘명사’가 아닌 ‘동사’가 되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고유명사’가 아닌 ‘고유동사’가 되어야 한다. 단어 마지막에 붙은 ‘사’는 일종의 ‘박제’를 떠올리게 하므로 빼도록 하자. 그렇게 내 갈망이 이름을 얻는다.


‘고유동(固有動)’.


나의 필명이자 지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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