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의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순간은 엄마가 귓밥을 파주실 때였다. 엄마가 귓밥 정리하자고 하시면, 나는 놀다가도 조건반사적으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의 무릎과 허벅지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귀를 하늘로 향하게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은 채. 조그만 코를 벌렁거리며 엄마의 포근한 체취를 맡았다. 그 향기가 어찌나 포근하고 달콤했던지.
당시 우리 집 귀이개는 숟가락 모양의 쇠붙이 재질이었다. 처음 귀를 팔 때, 나는 그걸 보며 이 조그만 숟가락으로 어떻게 밥을 먹냐고 엄마에게 따졌더랬다. 그때 엄마가 보여주신 미소가 떠오른다. 일단 누워보라고. 이걸로 어떻게 밥을 퍼먹는지 알려주겠다고. 나는 궁금해서 엄마의 무릎에 눕고. 엄마는 보드라운 손으로 내 머리를 옆으로 돌린다. 뭔가 주사 맞는 기분이 들어서 좀 겁이 났지만. 쇠붙이 끝 모양이 바늘이 아닌 숟가락이니 조금 안심하면서. 반신반의한 기분으로 누워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면내시경 직전의 상황과 비슷하다. 뭔가 긴장되지만, 시작하고 보면 별것 아니었던 그런 상황.
차가운 쇳덩어리의 감촉이 귓속으로 밀려 들어오고. 숟가락 모양의 뱀 대가리가 동굴 속에서 두리번두리번하더니 뭔가를 찾아낸다. 이윽고 딸려 나오는 누런색 부스러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굴 벽을 긁게 되는데. 이게 간지럽다기보다는 시원했다. 모기에 물린 자국을 손톱으로 긁을 때 느껴지는 그런 시원함. 마음에 행복이 들어차고. 몸이 나른해졌다. 눈을 떠서 앞을 보니. 휴지 밥그릇 위에 노란색 밥이 차려져 있었다. 개미 일가족이 한 달은 먹고살 만한 분량. 뭔가 생산해 낸 것 같아 뿌듯했다. 나는 그렇게 ‘귓밥 정리’에 흠뻑 빠졌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될 때까지도 엄마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무슨 다 큰 놈이 아직도 이러냐고, 머리는 왜 이렇게 무거워졌냐며 투덜거리셨지만, 손으로는 세심하게 아들의 귓밥을 파주셨다. 나는 그저 행복했다. 일곱 살 때의 엄마 향기와 열여덟 살 때의 엄마 향기가 똑같아서였다. 부드럽게 동굴 벽을 긁는 감촉. 그 시원함. 이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기에. 열여덟의 나도, 시간을 역행하여 일곱 살로 돌아갔다.
스무 살 이후의 혼자 하는 ‘귓밥 정리’는 몹시 힘들었다. 거울을 보며 귓밥을 파 내려가다 ‘아얏’ 소리를 내기 일쑤였고. 동굴 벽은 폭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 상처투성이였다. 아팠고 울적했다. 엄마의 무릎, 엄마의 향기가 없는 ‘귓밥 정리’는 참 별로였다. 그저 귓속에 낀 이물질이 과도하게 쌓이는 걸 방지하려는 목적을 가진. 뭐랄까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기계적인 논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더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것은 일상생활이자 과업이었으므로. 마치 숨 쉬는 것처럼. 나의 일곱 살은 감각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엄마가 얼마나 정성을 다해 세심하게 귀를 파주셨는지를. 허름해 보였던 노란색 밥에 얼마만큼의 사랑이 담겨 있는지를. 아들의 기억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조각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를. 그 추억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에. 엄마는 어머니가 될 때까지, 아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귓밥을 파주셨던 거다. 행복했던 첫 경험. 그 기억은 마음속 바다에 영원히 닻을 내렸다. 그것은 좌표다. 힘들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 정확하게 그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일곱 살의 기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내비게이션. 서른 살의 엄마를 느낄 수 있는 타임머신.
그러므로 그것은 소중하다. 엄마가 부재한 지금은 더욱 그렇다. 아마도 엄마는 지금의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하셨던 건지도 모른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음을 미리 아시고. 엄마는 아들에게 좌표를 남겨두셨다. 아들이 ‘귓밥 정리’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서른 살의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말이다. 딸이 면봉으로 아빠의 귀를 후비겠다고 달려들 때도, 아내가 귓밥을 파줄 때도. 내가 서른 살의 엄마를 추억하는 건. 그 이유에서다. 엄마의 보드라웠던 무릎, 엄마 품의 꽃향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서. 나는 오늘도 ‘귓밥 정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