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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l 05. 2024

세이렌


위례 신도시에 왔다. 생전 처음 오는 동네. 긴장한 뇌는 카페인을 요구한다. 낯선 동네에서 커피집을 찾기란 얼마나 쉬운가.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커피집을 검색하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가 1초도 지나지 않아 나타난다. 지금 시간은 아침 일곱 시. 이 시간에 오픈한 커피집은 많지 않다. 그중의 하나가 스타벅스다. 스타벅스를 둘러싼 이슈. 이를테면 가격 인상이라든지 이스라엘 지지라든지. 이런저런 이유로 스타벅스를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생기고 있지만. 나 같은 보통사람에게 스타벅스는 그냥 유명한 커피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른 시간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장소를 찾는 일이기에. 그런 거대담론은 살짝 옆으로 제쳐둔다.

 

저 멀리 스타벅스 로고가 보인다. 초록색 세이렌의 강렬한 손짓은 이내 음악이 되어 내 귀에 파고든다. 그 옛날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틀어막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묶었다지. 그때 내 귀도 밀랍으로 틀어막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몸도 자유롭고 귀도 뚫려 있기에 세이렌의 유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유혹에 빠진 자의 발걸음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경쾌하면서 즐겁게. 문을 열고 주문하는 곳으로 미끄러지는 몸. 그 행동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다.


나는 마법의 주문을 외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이는 디즈니 신데렐라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비비디 바비디 부!”와 같은 주문이다. 요정 할머니가 마법으로 신데렐라에게 예쁜 드레스를 만들어주듯, 바리스타는 기계를 이용해 나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들어준다. 예쁜 드레스는 딱 자정까지만 유효하듯. 아메리카노 또한 딱 정오까지만 유효하다. 생각해 보니 드레스와 커피의 역할이 같다. 옷은 사람을 꾸며주는 것. 옷을 어떻게 차려입었느냐에 따라 옷을 입은 사람의 인상이 결정된다. 벌거벗은 사람은 변함이 없으나 천 쪼가리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상이 휙휙 바뀐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이상하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 카페라테를 마시는 사람. 무언가 달라 보인다. 마치 그들의 옷처럼. 커피의 종류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는 것은 본능일까 아니면 지독한 사회화의 결과일까.


서늘한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다음. 혈관을 타고 올라가 뇌를 씻긴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연결고리를 확장해 커피집에 관한 생각에 다다른다. 스타벅스 매장 내. 원탁에 홀로 앉아. 커피 한잔을 옆에 두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내 모습. 꽤 괜찮은 그림이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본다면 뭔가 있어 보일 테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는 나를 상상한다. 왠지 별로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겠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과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달라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을 품는다. 나는 지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의 관점을 나를 바라본다. 대체 왜.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는 나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나는 똑같은 사람 아닌가. 장소는 나의 존재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내 정체성을 결정한다.


더 큰 문제는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 이것과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으로 그들을 본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내 관점은 지독하게 사회화되어 있기에. 어떤 사람을 보는 순간. 그 사람에 관한 판단을 결정해 버린다. 첫인상이 10초 이내에 결정된다고? 천만에. 그건 보는 순간 결정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내 망막에 닿는 순간. 망막과 뇌 또한 빛의 속도로 상호작용하여 개연성 있는 결과를 꺼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은 없다.


꾸준한 접촉과 밀고 당기기. 무르익어가는 감정. 이것은 원천봉쇄된다. 미리 만들어진 서랍에. 구획된 선반에. 타인을 밀어 넣을 뿐이다. 포장지를 뜯지도 않은 채. 이 얼마나 얄팍한가. 타인의 심연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경계선만 기웃거리는 관계란 얼마나 피상적인가. 하핫!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피식거리는 소리가 고요했던 매장 안을 점령하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다가 바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1초도 안 되어. 나는 다시금 웃음이 터진다. 불과 1초도 버티지 못하는 관계의 두께에 감탄하면서.


세상이 바빠졌기에 불가피한 일이라고. 관계의 접촉면이 넓어졌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다독여보지만 군색한 변명일 뿐이다. 나는 단지 듣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다. 타인의 말을. 타인의 목소리를. 타인의 접촉을. 거부하고 벽을 치고 있을 뿐이다.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한다. 내 귀는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내 고막은 타인의 음파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귀에 밀랍을 부어 넣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단편 〈세이렌의 침묵〉은 정말이지 놀라운 통찰이다. 노래하는 세이렌이 아니라 침묵하는 세이렌.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의 목소리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이미 밧줄과 밀랍이라는 구원에 매몰되어 있었으므로.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힌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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