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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l 03. 2024

생명 연장의 꿈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래 살길 희망한다. 부자들은 자신이 그동안 모아 온 재산이 아까워 오래 살고 싶어 하고. 빈자들은 어찌 됐든 이승이 낫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죽음을 앞둔 중환자는. 어떻게든 선고된 죽음을 늦춰보려 안간힘을 쓴다. 불과 몇 시간. 혹은 며칠이지만. 그들은 전 재산을 내걸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깊디깊은 무저갱. 모두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최대한 늦추려 하는 그것. 결코, 닿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갈망한다는 점에서. 오래 살길 바라는 마음은 참으로 애처로운 갈망이다.

 

생로병사. 간단하게 축약된 이 거대담론은. 진시황의 불로초로부터. 오늘날 바이오테크에 이르기까지 천문학적인 노력과 비용을 빨아들인다. 그렇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물론 근대와 현대를 비교하자면 인류의 수명이 늘긴 했다. 그것은 위생의 현격한 개선. 식생활과 의학의 발달 덕분이겠다. 그러나 지금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다. 나는 ‘백 세 시대’란 구호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대부분 어찌어찌해서 칠십 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그 이후로 병원을 전전하고. 팔십에서 구십 사이에 눈을 감는.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아닐까. ‘백 세’라는 단어에는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이를테면 행복, 추억과 같은. 따뜻한 모든 것이 가지치기되고, 결국 남는 것은 가족의 죄책감을 먹고 자란, 말라비틀어진 ‘바이털 사인’뿐이다.


딜레마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더라도. 유기체인 인간의 물리적 한계는 분명하다. 태어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힘으로 녹슬고 변형되며, 결국 바스러지게 되어 있으므로. 우주의 시간에 빗대어 보았을 때. 나라는 개인이 품고 있는 시간이란 얼마나 가느다란가. 찰나의 찰나에 불과한 그 시간이 ‘덧없음’이란 감정을 품게 한다. ‘칼 세이건’이 지구를 일컬어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했을 때. 나는 무언가 허무를 느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수많은 인물을 언급하며. 그들이 지금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고 말했을 때. 나는 또다시 허무를 느꼈다. 그러면서 피어나는 묘한 감정. 그건 명백한 한계에서 오는 비틀림. 죽음에서 피어오르는 ‘삶’의 가치였다.


영원한 평화를 갈망하는가. 10억 년이 흐르고 100억 년이 흘러도 영원히 똑같은 상태. 갈등도 없고 충돌도 없는.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하는 유토피아. 나는 그런 천국을 단호히 반대한다. 나에게 그런 ‘정지’ 상태는 죽음과 다름없다. 영원한 고통을 갈망하는가. 나는 지옥 또한 단호히 반대한다. 그 또한 ‘정지’ 상태와 다름없으므로. 천국과 지옥이 같은 메커니즘을 따른다는 것이 흥미롭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인류를 효과적으로 억압해 온 두 ‘장치’는 어찌 됐든 ‘변화’를 박제시킨다는 점에서. 디즈니 공주 책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닮았다. ‘운동’이 배제된 장치는 필연적으로 괴사 한다. 그런데도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유지된 이유는.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 사이에 유유자적 떠 있는. ‘삶’이란 섬 덕분이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그만 섬 하나. 이것이 모든 의미를 창조한다.


그러니 나에게 주어진 ‘찰나’의 삶이란 얼마나 눈부신가. 그것은 초신성. 한계까지 압축된 블랙홀이 기어이 터지는 순간. 존재의 강렬한 비틀림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삶’이라는 것을 재검토한다. 생명과 삶은 다르다. 생(나오는 것)과 명(목숨)은 탄생이다. 이것은 확정된 것. 죽음에 도달할 때까지 유지되는 일종의 고정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삶. 이것은 과정이다. 생명과 죽음의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가는. 영원히 움직이는 무엇. 이것은 애당초 연장이 불가능하다. 생과 사라는 다리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탄소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십 년을 더 살든, 이십 년을 더 살든. 우주적 시간에 비추어 본다면 어차피 같은 ‘찰나’로 수렴한다. 그러니 ‘수명을 늘린다’와 같은 논리란 얼마나 기계적인가.


이로써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하나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좀비처럼 삶에 휩쓸려 살아 ‘가는’ 일. 다른 하나는 생과 사의 다리를 충실하게 걸어가며 살아 ‘내는’ 일. 후자는 고난의 길이다.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한다. 그것이 ‘삶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므로. 삶을 누적해서 살아냄으로써. 주어진 삶을 두 배. 네 배 혹은 그 이상 농축해서 살 수 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언젠가 《어바웃 타임》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이 하루를 두 번 경험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는 대대로 물려받은 초능력을 사용하여. 삶의 밀도를 높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능력. 그것은 ‘글쓰기’라는 초능력이다.


쓰는 사람의 감각은 눈을 뜨면서부터 한없이 예민해진다. 같은 사물을 다른 각도로. 또 다른 각도로 살펴본다. 느낌을 다른 느낌으로 치환해 본다. 씻고, 옷 입을 때. 먹고 마실 때, 인스타 피드를 구경할 때. 여행을 떠날 때. 쓰는 사람은 감각의 안경을 계속 바꿔가며 경험을 흡수한다. 드디어 쓰는 순간. 쓰는 사람의 감각은 받아들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감각을 종이에 쏟아낸다. 쓰는 사람은 당황하고. 그 당황마저도 종이에 흡수되며 키메라가 빚어진다. 쓰는 사람은 경험을 곱씹는다. 쓸 수 있는 도구는 오로지 언어뿐. 단어와 문장을 비틀고.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을 고려하고. 쓰는 사람은 키메라를 그럴듯하게 주무르면서 무언가를 창조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은 한없이 늘어나고. 삶의 밀도는 증가한다. 곱씹는 횟수와 비례하여. 찰나는 영원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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