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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l 16. 2024

초록색 점선

제4회 DMZ문학상 일반부 산문 '차하'수상작품


  한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초록의 선. 마치 목탄 질감의 4B연필로 그린 듯. 두터움과 흐릿함이 공존한다. 화가가 그린 게 아니다. 술 취한 사람이 이성을 잃은 채 비틀거리며 그린 선이다. 산의 능선을 따라 들판과 강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그려진 선이 가관이다. 선은 마치 불도저처럼 앞을 가로막는 나무와 바위, 개울과 습지를 깡그리 밀어버린다. 여기에는 하나로 관통하는 맥락도, 중심을 꿰어내는 의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그어진 기이한 선만 덩그러니 존재할 뿐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금 특이한 선이다. 한 번에 그어진 선이 아닌 듯.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이 있다. 내 시선은 제일 처음 그려진 선을 향한다. 낡은 철책이 듬성듬성한. 현미경으로 보면 ‘군사분계선’이란 낡은 팻말이 박혀있는 어떤 점선을. 나는 망원경을 통해 실선처럼 보고 있다.


  종이에 표시된 점선은 어떤 사건의 발생을 예감하는 ‘징후’이자, 사건이 마무리되지 못했음을 알리는 ‘여운’이다. 점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면 가위로 잘라야겠다는 생각이라든지, 진한 네임펜으로 실선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감이 밀려든다. 종이의 한 편과 다른 편은 아직 나누어지지 않았음에도. 나는 분리를 떠올린다. 생생하게 실존하는 한반도는 한 덩어리임이 분명하건만. 마음속 흐릿한 점선은 지리적 진실과 무관하게. 기어이 내 마음속 땅덩어리를 둘로 나누고야 만다. 현실 세계에서는 붙어있으나, 가상세계에서는 나누어진 상태. 이것이 겹쳐지면서. 붙어있지만 나누어진 모순이 발생한다. 나는 부지불식간 ‘점선’의 탄생을 이해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내 앞의 저 점선은 ‘불안’이다. 상반되는 감정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없이 붉었으나, 지금은 한없이 초록인 선. 한때 전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고요한 곳. 양극단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감정의 출렁임이 심하다. 멀미가 날 정도로. 미리 약을 먹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자연스레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1953년 7월을 회상한다. 어떤 화로가 보인다. 화로에서는 화염이 맹렬하게 쏟아지고, 다시 담긴다. 자세히 보니 화로는 하나가 아니다. 족히 수십 군데, 수백 군데에서 화로가 타오른다. 괜히 눈이 시려진 나는 연기 핑계를 대며, 현미경 대신 망원경을 눈가에 갖다 댄다. 멀리서 보니 한반도의 허리에 불타는 띠가 감겨있다. 저렇게 타오르는 허리띠를 계속 두르고 있다가는 화상을 입을 게 분명한데도. 한반도는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는다. 그 인내심이 깊고도 진하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탄성을 내지르려는 찰나에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 얼굴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가느다란 물기가 촉각을 긁고 있다. 어느덧 화로에 불이 꺼진다. 붉게 달아올랐던 화로는 이내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시시각각 녹슬어간다. 나는 화로 안을 들여다보고 놀란다. 이글거리는 화염은 사라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잿빛 뼛가루만 잔뜩 남아있어서다. 그 운명의 진폭에 다시 멀미가 난다. 멀미는 타임머신이므로. 나는 다시 과거 앞에 선다.


  이번에는 어떤 소리가 들린다. 철판을 강제로 찢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아니면 지구만큼이나 거대한 파쇄기에 한반도를 욱여넣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가늠하기 힘든 데시벨의 소리가. 내 귀를 마비시킨다. 어느 전쟁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상륙작전을 위해 해상을 맴도는 배 한 척. 이름 모를 해안에 다다른 배의 문이 열리고. 이어지는 포성과 총성. 고통 어린 신음과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함. 이런 소리 덩어리들이 한데 뭉쳐져 형체 없는 포탄이 된다. 눈이 없는 포탄은 한 병사의 귀를 강타하고. 고막은 기능을 상실한다. 지금의 내 모습이 그 병사와 같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언가 세게 부딪히는 소리. 한 군데가 아니다. 수십 혹은 수백 군데의 산과 들판에서. 소리의 포탄이 지면을 강타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그 감정 없는 소리는 지면이 패이며 발생하는 소리와 합쳐져 증폭된다. 소리는 소리를 먹는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성장하는 소리. 그 육중한 덩치가 다시 한번 한반도를 강타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반도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 그냥 계속 얻어맞을 뿐이다. 덕분에 내 귀는 시시각각 기능을 상실해 간다.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소리의 포탄이 멎자. 내 귀에는 고요만이 남았다. 마치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쓰고,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한 사람처럼. 귀는 먹먹함을 한껏 머금었다.


  그러니 멀미가 심해질 수밖에.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양극단에서 오는 피로에 더해서, 감정의 진폭마저 나를 괴롭힌다. 현재가 과거를 마모시켰으므로, 내 감각은 기능을 상실했다. 감각은 기억을 의심한다. 나는 장기기억을 잃어버렸다. 오로지 현재가 비춰주는 짧은 기억만 배회할 뿐이다.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펄떡이는 현재뿐이다. 그런데 지금 내 눈엔 흐릿한 점선만 보인다. 이런 막막함이 달팽이관을 뒤흔든다. 내 몸은 이제 한계다. 버텨내려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능에 따라 구역질을 한다. 이어서 쏟아지는 실체 없는 토사물. 변증법은 결국 ‘합(合)’에 이르지 못했다. 정(正)과 반(反)을 가로지르는 끝 모를 간극만 확인했을 뿐. 저 멀리 보이는 초록의 점선은. 합(合)에 다다르지 못한 한반도의 아쉬움을 증명한다. 실선이 되지도 못하고. 점선을 지워내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을 맞닥뜨린 초록의 ‘불안’을 보며. 나는 한반도가 비명을 지르지 않고 침묵한 이유를 납득해 버렸다.


  선은 해가 갈수록 녹음으로 짙어지는데, 기억은 해가 갈수록 흐려지는 아이러니. 녹슨 화로는 계절이 변할 때마다 바스러지며 잿빛 뼛가루를 흩뿌리고. 고요를 머금은 귀는 바람이 변할 때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킨다. 새삼 느낀다. 시간은 언제나 현재의 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재라는 부표는 시간의 강 위에 둥둥 뜬 채. 같은 속도로 밀려간다. 내 기억은 현재에 매여있으므로. 과거를 망각한 채 현재에 붙들려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초록색 점선을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다. 기억이라도 생생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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