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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이 Nov 01. 2023

수인선

가장 오래 남편의 여친이었던 그녀의 편지 17

ㅇㅇ 손안에

항상 이맘때가 되면

가는 해의 울적함을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과 벅찬 기대감으로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새해를 맞는 마음으로 안식의 촛불을 켜고 싶어

때론 지켜주고 싶고 때론 감싸고 싶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회한의 미소도 보여주고 열띤 박수도 보내 줄 수 있는

여유의 빛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가득 찬 물동이를 내려다보며 저 밑바닥에서부터 밀리고

밀리는 물보라의 전쟁에서 승리의 쾌감을 맛보기보다는

자기변명이 묵인되는 패자의 심정을 헤아리고 싶은 만큼

그렇게 보낸 고三 생활에서 혼자서는 나무가 되는 노력에

공감대를 형성해 주기도 하구 동조해 주고 성원을 아끼지 않은

너에게 진실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야.

ㅇㅇ

이제 흔들리는 바람 소리의 물결 속에 지금까지 떠올랐던....     

...... 중략......     

슬픈 것이기를 한 번도 원하지 않으면서 출발의 쾌감을

느낄 순간이 눈앞에 다가서고 있어

마치 광대한 창공에 여명이 물결치듯이

지금 이 순간이 출발의 순간 직전의 순간이기를

바라면서 거의 끝나가는 이 해

행운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몸을 키울 수 있도록

내가 믿는 신께 빌어 줄게     

안녕

1981. 12. 31.    


  

온 세상이 고요하게 잠든 밤이구나!

ㅇㅇ아

이 밤도 안녕을 묻고 싶구나

난 오늘부터 출근을 했어

사회는 너무나도 냉정하고 겁이 나

처음으로 내딛는 초년생인 나는 모든 것이 무서워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을 이겨내야 하겠지

지금 굉장히 피곤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아

우리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자

.......

아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적을 거야

우리 26일 2시에 황태자에서 만나자

길게 쓰고 싶지만 지금 굉장히 피곤해

그리고 내일 또 출근해야 해.

나의 직장은 어쩌면 네가 실망할지 모르겠어.

그것은 만나서 얘기할 게.

안- 녕 – 편지 좀 해-  

                   1982. 1. 20. ㅇㅇ가

       



ㅇ 손안에

분주했던 모든 사람들도 이제는 약간 조용해진 듯싶다.

오늘은 겨울 날씨 답지 않게 따뜻한 분위기인 것 같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친구에게 펜을 잡은 것 같다.

시험 점수는 잘 나왔으리라 난 생각한다.

이제는 대학입학 원서도 마감되었지.

진심으로 바란다. 요번 해는 좋은 대학 꼭 가길

(3일) 기다렸다. 그런데 연락이 없더군.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막상 만나서 얘기 할려고 하니 무슨 말을 해야 옳을지

몰랐어.

친구는 옛날 그 모습인 듯 싶어 반가웠어.

요즈음에는 너무나도 변하는 친구들이 많거든(?)

지금 이 시간은 조용한 사무실이야

나의 할 일은 모두 끝나고 책을 보다가 문득 친구가

생각나서 몇 자 적어 본다

예쁜 종이 위에 예쁜 글씨로 나열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예쁜 것이 없구나.

계속해서 연락 자주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해

올해는 멋진 대학인이 되길 바라면서

-안-녕-


또 연락 주고-

1984. 1. 10.

         ㅇㅇ   




81, 82 ,84,  4년에 걸쳐 12월과 1월에 쓴 그녀의 편지다

나도 알고 있는 그녀. 성도 이름도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다.

아마 남편의 가장 오랜 여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오래 그녀의 이름이 남편 입에서 오르내렸었다.

그러나 그녀의 촌스러운 이름 때문인지

 질투란 것이 생기지 않았다.

다만 남편이 그녀 이야기를 하면서 했던 말을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ㅇㅇ가 수인선 타고 송도가자” 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하며 남편은 내게 말했다

“ ‘수인선’이란 말 참 예쁘지 않니?”라고...

그녀가 말한 수인선

그 수인선이 예쁘다고 내게 말한 남편.

그 후

평생

지금까지

수인선이란 말을 들으면 어김없이 나는 그녀가 떠오른다.

질투였을까.     


81년도 12월 마지막 날 편지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뭔가 그럴듯하게 비유을 나열하지만 어울리지 않는다.

그시대의 글쓰기 법이다. 어디선가 주워 온 미사려구를 나열한다.

하여 편지는 뭔 소리인지 모르는 말을 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 뭔 개소리야” 할 것이다.


졸업을 하고 그녀는 취직을 했나 보다.

편지봉투에 보니 교육청인지 조달청인지 공무원이 된 거 같다.

3통의 편지를 보면 그녀의 편지가 변화해가고 있다.

문체도 글씨체도 변했다.

세 번째 편지는 비유가 사라지고 직언을 하고 있다.

남친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서로의 처지가 달라지면서 서서히 연락이 뜸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늦게 보낸 84년 편지가 가장  낡아 있다.


물동이, 촛불, 파수꾼...

당시에는 어여뻤을지 모르는 언어들도 낡고

화사했던 편지지도 퇴색되고

마음도 몸도 떨림들도 사라졌다

무덤덤하게 나이먹듯 다 굳어가고 있다.

나이 들면 얼굴만 쭈그러드는 것이 아니다.

추억도 함께 쭈그러든다.

앞으로 그녀의 편지는 더 쏟아져 나올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수인선 타고 송도에나 가볼까.

송도 맛집이나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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