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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이 Apr 18. 2024

I'm a 우먼 인 러브

소녀들에게 주는 충고

ㅇㅇ 오빠에게

오빠! 안녕?

나도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편지 답장 늦어져서 미안해요.

핑계지만 제 친구 지ㅇ이가 대신 답장한다고

하면서 편지까지 썼으면서 안 보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미루었다가 오늘서 쓰는 거예요.

정말 미안해요.     

그날 가서는 마침 아빠가 병원에 가셔서 안 혼났어요,     

다음날 학교에서 세 친구들은 “ 애고 조금만 더 기다릴 걸” 하며

서운해했어요,

그러면서 오빠보고 다음부터는 인천에서 만나재요.

저도 그랬으면 해요. 오빠한테는 불편하겠지만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참!

윤ㅇ, 지ㅇ이가 편지에서 보낸 사진 보고 자기들은

사진 현상 안 해줬다면서 2장 더 보내래요.

될까요? 부탁해요.     

이번에 답장받는 것이 급해서 3장이 왔는데

시 하고 앞뒤로 1장밖에 안 읽었어요.

답장하려고 다시 펴보니까 3장이 되잖아요.

편지의 오빠 충고 달갑게 받겠어요.     

제 장래 희망은 의학박사!

오빠! 오해하지 말아요.

난 밥보가 아니거든요.

군것질은 좋아하는 편이지만......

내 생일은 해마다 며칠씩 변해요

이번 제 생일은 12월 20일이에요.

웃기는 말 같지만 책은 제 수면제예요.

시험공부 때문에 음악을 통 못 들어서...

요즘은 대지를 읽는데 3번째 읽는 거예요.

이 편지 쓰는데 “ 우먼 인 러브” 가 흘러나오고 있어요.


이번 시험 저는 마음 푹 놓고 치렀어요.

시험 보는 전날 TV 12시까지 보고,

커피 한 잔 하고 밤을 새웠어요,

공부, 한 6시간 했나 봐요.

저는 시험공부할 때 항상 먹어야 해요.

그래서 시험 때만 되면 아빠가 제과점에 꼭 들르죠.

몇 주일 전에 우리 학교 2학년 생들은 청학으로 소풍 갔었는데

반 대항 연극을 했는데 우리 반은 ‘신판 심청전’을 했어요.

제가 역시 심청이죠. 아깝게도--

2등에 머물렀지만 참 보람 있는 하루였어요.     

다음부터는 편지 답장 빨리 해주기고

약속할게요.

오빠? 답장 늦게 해 줬다고 삐진 것은 아니죠?

그렇죠?

그럼 이제 그만 펜을 놓겠어요.

몸 건강히 안녕!     

1981. 11.1. 월 인천에서        




.......


이런 시시껄렁한 편지를 쓰고 또 기다리고.....

우리는 한때 다 이런 시절을 보낸 것일까.

이 편지들이 유치하고

하고 싶은 말들을 다 못하고 빙빙 돌리면서

지금 ‘우먼 인 러브’가 흘러나오고 있다고......

자신은 오빠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습지만

지금 학생들도 젊은이들도 별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편지를 쓰고 부치고 기다리고 또 쓰고 부치고 기다리고..... 를 하지 않을 뿐

당시 편지 답장을 늦게 보내는 것은 지금의 카톡 읽씹 같은 것이었겠지

현재의 연인들은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카톡으로 얼마나 많은

시시껄렁한 말들을 주고받을까.

(이 여학생은 양력 음력도 몰라 해마다 생일이 바뀐다고 하다니 어이없다.분명  남편은 이 여학생을 좋아하진 않았을 거 같다.아님 말고ㅋㅋ)

...

"뭐해요?"

"밥 먹었어요?"

"날씨가 좋네요"

"꽃이 지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

하나마나 한 대화들

시대가 바뀌어 종이에 쓰지 않을 뿐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

과거든 현재든 나이먹든  사랑을 시작할 때의 마음은  같겠지..


 나는 설령 LTE급으로 잊히더라도

깔끔하게 삭제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시스템이 마음에 든다.


오래 기억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변함없다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 나이 되어 보니

한때 옳다고 좋다고 믿었던 것들이 많이 달라져 있다.

영원한 것처럼 끔찍한 것도 없고,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도 없다.

태양 아래 모든 것은 변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계절이 변하듯 흘러가고 사라지고 완전히 잊는 것.

몽골 초원에서 보았던 하얗게 말라버린 짐승의 뼈처럼

바람결에 사라지는 것들이 아름답다.  

   

오래된 것들은 다 퀴퀴한 냄새가 난다

이 편지들의 묵은 곰팡내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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