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싸인 May 21. 2018

[코싸인의 인지과학 이야기]
기억(1)

망각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망각을 하며 살아가는 망각의 동물이다. 여러 측면에서 망각은 효율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나 원치 않은 망각으로 인해 고통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원리로 이토록 불편함을 초래하는 망각을 하는 것일까? 


망각은 기억이 없인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망각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지과학자들은 연구를 진행하며 기억을 역할에 따라 세분화시켜 정리하였고, 현재 단기기억, 장기기억을 넘어서 내재기억, 감각기억, 일화기억 등 많은 기억으로 정리되었다. 우리는 이 중 가장 큰 체계의 기억이며, 망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영향을 받는 기억인 단기기억, 장기기억, 작업기억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단기기억이란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정보를 저장하는 기억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전화를 걸기 전 외우는 전화번호와 같은 예시가 단기기억을 설명할 때 자주 이용된다. 하지만 이런 단기간동안 필요한 정보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기억들은 단기기억 단계를 거치게 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영어 단어를 외울 때 단어는 먼저 단기기억으로 저장된 뒤 장기기억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단기기억에는 여러 재미있는 특성이 있다. 먼저, 다음 숫자를 간단히 외워보라. 어느 정도 외웠다고 생각되면 이 수를 다시 보아서는 안 된다. 


7611598073 


우선, 많은 사람들은 이 열 자리의 수를 짧은 시간 안에 외우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기기억은 일반적으로 7~9 기억덩이만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수는 언급했듯 열 자릿수이기에 단기기억의 용량을 초과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억 덩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다음 예시를 보자. 


1592,6535,8979 


이는 앞서 언급한 수보다 긴 열두 자리의 수이다. 하지만 1592, 6535, 8979를 각각 한 덩이라 생각하면 보다 쉽게 외울 수 있다. 이렇게 간단한 정보들을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기억덩이이다.


그럼 이제 처음 예시의 수를 떠올려보자. 아까는 분명 그 수를 외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수가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단기기억의 중요한 특성 중 한 가지이다. 단기기억의 저장시간은 길어도 수 시간을 지나지 않으며,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금방 잊힌다. 여러분들 또한 이 글을 읽으며 새로운 생각들을 하며 단기기억에 새로운 정보들이 입력됨에 따라 이전의 정보들이 지워진 것이다. 이렇듯 단기기억의 정보들은 매우 휘발성이 강하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점이 있다. 처음의 예시의 수를 보지 않고 다시 떠올리려 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서 말했듯 수 전체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수가 7로 시작했다는 사실과 3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기억할 것이다. 이렇듯 기억에서 처음과 마지막 정보를 더 잘 기억하는 것을 각각 ‘초두효과’와 ‘최신효과’라 한다. 


작업기억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연구자들마다 작업기억을 다르게 표현하는데, ‘오래된 단어인 단기기억을 대체하는 새로운 단어’부터 작업기억만이 일시적 기억 저장소의 역할을 한다는 표현까지 수많은 의견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단기기억과 작업기억을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장기기억의 형성과 망각에 있어서는 둘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도 문제가 없으므로 여기까지만 들여다보고 넘어가겠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가 얻는 정보는 단기기억을 거쳐서 장기기억이 된다. 이 과정에서는 해마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에 관해서는 매우 중요하며 유명한 연구사례가 있다. 

1900년 중순, 심한 뇌전증을 앓고 있던 H.M (Henry Molaison, H.M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은 이를 치료하기 위해 해마와 내측 측두엽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 후 뇌전증 증상은 해결됐지만, 그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됐다. 보드게임이나 농담도 잘 하는 등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는 듯해 보이기도 하는 그였지만, 그는 새로운 장기기억을 형성할 수 없었다. 인지과학자들은 이를 통해 해마가 장기기억의 형성에 관여한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그의 뇌는 이후로도 기억에 관한 여러 인지과학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럼 해마에서 형성된 장기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 것일까? 인지과학자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장기기억이 저장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를 기억흔적(Engram)이 칭하기로 했다. 기억흔적은 시냅스 가소성으로 인해 형성된 시냅스 연결로 형성된다고도 하고(신경생물학적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특정한 단백질에 저장된다고도 하며, 이들 모두 아닌 다른 어떠한 기작을 통해 저장된다고도 하지만, 아직 이에 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사실은 없다. 비록 기억이 어떤 형태로 저장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인지과학자들은 기억흔적이 뇌의 어느 한 위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해마, 변연계 등 여러 위치에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이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일반적으로 망각은 장기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기억흔적에 정보가 저장된다면 왜 기억이 잊히는 것일까? 망각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1800년대 에빙하우스의 연구에 뿌리를 둔다고 본다. 


망각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 또한 ‘에빙하우스 망각곡선’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독일의 심리학자인 에빙하우스는 자음 19개로 시작해서 모음 11개, 자음 11개로 끝나는 아무 의미가 없는 약 2300개의 단어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후 이를 무작위 순서로 정리한 뒤, 일부를 뽑아 그 순서를 외웠다. 충분히 외운 뒤 시간에 따라 테스트를 하며 기억수준을 평가했고, 이를 통해 기억과 시간의 관계를 도출해냈다. 그 그래프는 다음과 같다. 

이처럼 기억수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수함수적으로 감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학자들은 기억이 이후의 기간(파지 기간)의 길이에 영향을 받는다는 쇠잔이론을 내세웠다. 쇠잔이론이란 어딘가에 저장된 기억흔적이 물질대사와 같은 여러 체내 작용으로 인해 점점 지워져 강도가 약해진다는 이론이다. 이 쇠잔이론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파지 기간 동안의 경험에 관계없이 시간에 따라서만 기억수준이 감소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억 수준은 파지 기간 동안 어떤 경험을 하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아래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실험으로, 파지기간동안 잠을 자는 경우 다른 일을 하는 경우보다 기억 수준이 더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쇠잔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인 간섭이론이 등장했다. 간섭이론에서는 새로운 기억과 기존의 기억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과거의 기억이 최근의 기억에 영향을 주는 것이 순행 간섭, 최근의 기억이 과거의 기억에 영향을 주는 것을 역행간섭이라 한다. 예를 들어, 효소가 영어로 Enzyme임을 알고 있는 당신이 효소의 스페인어 Enzima를 배운 후 시험을 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당신이 영어 Enzyme 대신 Enzima를 적는다면 새로운 기억인 Enzima가 과거의 기억인 Enzyme에 간섭했으므로 역행간섭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Enzima 대신 Enzyme을 적는다면 이는 과거의 기억인 Enzyme이 새로운 기억인 Enzima에 영향을 준 순행 간섭에 해당된다.


망각은 또한 인출의 실패라는 관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특정한 정보에 얽힌 정보가 너무 많으면 인출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려 인출이 실패하게 된다. 일례로, 스페인어를 열심히 배운 당신에게 누군가가 스페인어를 해보라고 한다면 뭐라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멍해지는 그런 현상이 있다. 이렇게 연결된 정보가 너무 많아 인출에 어려움이 생기는 현상을 두고 부채 효과(fan effect)라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스페인어로 인사를 해보라고 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연결된 정보가 많아서 인출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 단서를 주는 행위가 인출에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기억은 이러한 단서의존성을 지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억과 망각에 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사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기작으로 인해 망각은 피할 수가 없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중요한 기억해야 하는 사실을 기억을 못 하더라도 당당해질 수 있다. 이는 학습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파지기간 경험의 특이성 때문일 수도 있고, 부채효과로 인한 인출의 실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양병환 외 10인. 『기억』. 서울 : 하나의학사, 2001 

•이반 이스쿠이에르두. 『망각의 기술』. 김영선 (역). 서울 : 심심, 2017 

•존 R. 앤더슨. 『인지심리학과 그 응용』. 제 4판. 이영애 (역). 서울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이정모 외 4인. 『인지심리학』. 서울 : 학지사, 2009 

•H Eichenbaum, "Still searching for engram", Springer; 2016 

•B Aben. “About the Distinction between Working Memory and Short-Term Memory”. frontiers in PSYCHOLOGY; 

2012 

•JMJ Murre. ”Replication and Analysis of Ebbinghaus’ Forgetting Curve”. PLOS ONE; 2015 

•H ebbinghaus. “Memory: A Contribution to Experimental Psychology” 

•JG Jenkins. “Obliviscence during Sleep and Waking”. JSTOR; 1924 


작가의 이전글 [코싸인의 인지과학 이야기] 아름다움(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