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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혜연 Mar 01. 2023

헤어진 애인의 생일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우린 분명 헤어졌고, 그 후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렸고, 그 사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어떤 날은 미친 듯이 그리웠다가, 또 어떤 날은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애초에 그가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와의 모든 시간들이 마치 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없는 한국에서의 삶에 적응하려 애쓰며 나름대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새 낯설어져 버린 사소한 것들은 신선한 자극이 되어 다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바쁩니다. 한국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여행보다 흥미롭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합니다. 한국이 아름답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내가 곧 다시 떠날 거라 그런 것이라 말합니다. 취업 면접에서도 몇 년 동안 거처를 옮겨다닌 이력 때문인지 출국 계획을 먼저 묻습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내가 큰 정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게 느껴집니다. 어째 이곳에서도 이방인이 된 기분입니다.


 요즘 나는 그의 영상들을 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함께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면서 이미 수십 번 봐온 영상들을 보고 또 봤었는데 말입니다. 내가 없는 그의 영상을 보면 우리의 이별이 실감 납니다. 어느새 내가 없는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습니다. 그의 영상에서 내가 언급되는 댓글도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살이 오른 그의 편한 얼굴에서 활기를 찾은 좋은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내가 망쳐놓은 그가, 나를 알기 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멋진 모습으로 스스로를 되돌려놓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언젠가 그는 영상에서 여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이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면 조금 아픕니다. 그 외에는 다 괜찮습니다. 진심입니다. 별로 아프지 않은 이별이라 다행입니다. 자연스럽게 멀어져가는 이별은 우스우리 만큼 쉽습니다.


 가끔은 여전히 그의 많은 것들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한없이 슬퍼져 눈물이 납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입니다. 뭐가 슬픈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기나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별조차 슬프지 않았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명확해진 건 없습니다. 미련 때문인가 봅니다.


 그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와도 여전히 연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별 후엔 그보다 그의 어머니와 더 자주 연락했습니다. 그와 헤어졌다는 것을 공표하지 않았을 때의 어느 날, 우리가 관계를 이어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구독자는 내가 한국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을 것이라는 댓글을 썻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대댓글로 그에 반발하며 저를 보호했습니다. 그건 마치 내가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죄책감을 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또다시 전해야 했습니다. 이미 아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나의 갑작스런 장문의 메시지로 인해, 그의 어머니는 내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어머니는 '너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더라도 괜찮아. 네가 행복하면 다 괜찮아. 여전히 너는 나의 딸이고 나는 언제나 너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한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나에게, 그리고 그에게 좋은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입니다.


 한국에 온 지 벌써 반년이 되어갑니다. 그사이 만난 지인들이 우리의 관계를 물을때마다, 나는 그저 시간을 가지고 있는 중이라는 모호한 답변을 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서른이라 그런지, 애매한 관계 끝에 매달려 있는 나에게 소개팅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를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새로 누군가를 만나고픈 생각이 없는 걸로 보아 그리 외롭지는 않나 봅니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다시 연애를 시작한다면, 그 상대는 분명 한국인일 것입니다. 그는 내게 가장 완벽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이지만, 그도 마찬가지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그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보니,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던 것이 벌써 일주일 전입니다. 그 마저도 짤막한 안부 인사일 뿐입니다. 조만간 나를 보러 한국에 오겠다는 약속도 희미해져 갑니다. 그는 꼭 오겠다고 했지만, 그 말도 더이상 하지 않게 된 걸로 보아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외국인 남친과는 자연스러운 만남 따윈 없습니다. 우리가 우연히라도 마주치기에 이 세계의 시공간은 너무도 큽니다. 어쩌면 영영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그가 죽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봐둘걸, 좀 더 많이 안아둘 걸 그랬습니다.


 오늘은 그의 생일입니다. 오늘 태어난 그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어딘가에서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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