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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Oct 19. 2021

천 개의 소망과 천 개의 욕망

아난다 사원과 미얀마 바간(Bagan)

아난다 사원(Ananda Temple)이 완공된 후 짠시타(Kyanzittha) 왕은 사원을 건설한 8명의 수도사들을 모두 죽였다. 신하들은 왕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 8명의 수도사들은 자선을 베풀어 달라며 왕을 찾아왔다. 짠시타 왕이 미얀마 최초의 통일을 이룩할 정도로 큰 업적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명상을 했던 히말라야산맥과 그 중 난다믈라 동굴(Nandamula Cave)을 명상적인 영적 기술을 발휘하여 묘사했다. 왕은 그들의 설명에 흠뻑 빠졌고 결국 바간(Bagan)에 그 모습을 구현해주기를 요구했다. 완성된 사원은 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왕은 흡족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원이 다른 곳에 지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8명의 수도사들을 모두 죽였다.

짠시타 왕은 사원을 ‘아난다’라 불렀다. 산스크리스트어로 ‘끝없는 지혜’, 팔리어로 ‘행복’을 뜻하는 ‘아난다’는 기원전 5세기 실존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부처의 사촌이며,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난다는 부처 사후 그의 말씀을 불경으로 편찬하였다. 수도사들의 죽음과 사원의 이름을 함께 보면 짠시타 왕은 수도사들의 죽음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사원의 건립을 통해 자신의 잘못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난다 사원이 지어지고 나서 60년 가량이 지난 1167년 바간에서 가장 큰 담마양지(Dhammayangyi) 사원이 건립됐다. 사원을 건립한 나라투(Narathu) 왕은 짠시타 왕의 증손자다. 나라투 왕은 아버지 알라웅시투(Alaungsithu) 왕과 남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이 속죄를 위해 담마양지 사원을 건립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나라투 왕은 사원 건립을 통한 속죄를 이루기 전 신할라족에게 암살당했다.

오랫동안 불교를 믿어온 미얀마에는 살아 생전에 나쁜 짓을 많이 하면 쥐나 고양이 같은 하찮은 동물로 환생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역대 왕들은 사원 건립을 통해 현세에서 지은 죄를 벌충하고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았다. 사원을 건립할 만큼 재력이 없는 일반 백성들은 불탑을 쌓고 불상을 만들며, 그도 안되면 적어도 시주를 했다. 환생의 최종 목적은 부처, 남자, 최소한 코끼리와 같은 존엄한 동물이었다. 현재 바간에는 더 나은 다음 생을 살고 싶은 마음이 담긴 2,200 여개의 사원과 탑이 남아 있다.

바간은 아나와타(Anawrahta)왕이 바간왕조(Pagan Kingdom, 1044~1287)를 세우면서 수도로서 번성했다. 바간왕조의 기원은 당나라 때 티베트-버마족이 현재 중국 윈난 지방에 세운 남조왕국이다. 이라와디(Irrawaddy) 계곡을 따라 버마로 들어온 바간왕조와 함께 소승불교가 미얀마에 퍼지기 시작했다. 바간왕조의 전성기 때에는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도시로 유입됐고 종교 간의 교류로 만 개가 넘는 사원과 종교적 상징물들이 세워졌다. 인구도 20만 명에 이르렀다.


바간왕조는 몽골의 침입으로 1301년에 멸망했다. 이후 민사잉 왕조(Myinsaing Kingdom, 1297~1313)가 이 지역을 지배했지만 수도로서의 지위는 잃었다. 이후 어느 시기에도 바간은 미얀마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믿음은 권력보다 오래 지속된다. 순례자들은 여전히 바간을 찾았고 200 여개의 사원이 추가로 지어졌다.

바간의 사원과 불탑에 가장 큰 피해를 준 건 지진이었다. 1900년 이후 400회 이상의 지진이 있었고 1975년 7월 8일에 있었던 대지진은 치명타를 입혔다. 거기에 1990년대 들어서 미얀마 군사정부가 바간을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해 무분별한 복원작업을 진행하여 원형이 훼손됐다. UNESCO는 바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거부하다 2년 전 승인했다.


16세기 미얀마 통일을 이룩한 따웅우 왕조(Toungoo Dynasty, 1531~1752)의 바잉나잉(Bayinnaung) 왕은 수도를 양곤(Yangon) 인근으로 옮겼다. 이후 마지막 왕조였던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1752~1885)가 만달레이(Mandalay)로 수도를 일시적으로 옮긴 적이 있었고 군사정부 때 신수도 네피도(Naypyidaw)가 만들어졌지만 양곤은 ‘미얀마 제1의 도시’라는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바간 만큼은 아니지만 양곤에도 많은 사원과 불탑이 있다. 2600년 전에 지어졌다는 술레(Sule) 파고다는 양곤의 중심부에서 미얀마 정치와 이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고 쉐다곤(Shwedagon) 파고다는 가장 신성한 종교적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일과를 끝내고 쉐다곤 파고다를 찾은 양곤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 단순히 기도를 올리는 종교적 장소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 같다.


올 초 미얀마에서 세 번째 쿠데타가 일어났다. 1945년 독립 이후 우리나라와 정치적으로 너무 유사한 과정을 겪었던 미얀마는 2015년 최초의 문민 대통령을 탄생시켰지만 다시 첫 번째 쿠데타가 일어났던 1962년으로 돌아갔다. 폭력적인 진압 장면과 민간인의 희생 소식 그리고 미얀마 전통 치마인 터메인이 걸려 있는 빨랫줄을 자르고 진입하는 군인들을 보며 세 번째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또한 과거 왕들처럼 현세의 죗값을 사원과 불탑의 건립을 통해 상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동시에 몇 년 전 미얀마 출장 때 만났던 사람들과 오며 가며 눈에 들어온 장면 속 미얀마인들이 떠올랐다. 네피도의 휑한 도로를 어머니와 걷던 어린 남매, 깻잎을 동그랗게 펼치던 바간 시장의 아낙,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달리는 트럭 짐칸의 일꾼들, 바간을 우리에게 안내해 준 꿈이 컸던 가이드 그리고 낡은 오토바이를 몰며 달리는 청년. 그들 모두는 지금 안녕할까?

역사의 간격은 짧아질 수 있지만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없다면 쿠데타 이후 그들의 삶은 더 혼곤해질 것 같다. 미얀마어로 ‘갈등의 끝’이라는 뜻의 ‘양곤’이 더 멀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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