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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Oct 22. 2021

근대 시민사회의 랜드마크

에펠탑(Eiffel Tower)과 파리(Paris)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타워 계획은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를 대표하는 구조물로 선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에펠은 실망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 이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1889년 파리 국제박람회’가 개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박람회를 주관하는 상공부 장관에 임명된 에두아르 로크로이(Édouard Lockroy)는 300m 높이의 4면 철탑에 대한 검토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공모지침을 수정하였다. 당시 높이 300m는 공학적으로 이루기 힘든 도전이었지만 에펠에게는 웬만한 경쟁상대를 이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실제 공모 결과 발표 당시 심사위원회는 에펠의 계획안 외 다른 계획안들은 비현실적이거나 디테일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에펠탑 설계는 1884년에 시작됐다. 설계는 에펠이 아닌 그가 세운 회사(Compagnie des Établissements Eiffel)에 소속되어 있던 엔지니어 모리스 쾨클랭(Maurice Koechlin)과 에밀 누기에(Émile Nouguier)가 했다. 에펠은 두 엔지니어의 설계안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의 건축부서를 이끌고 있었던 건축가 슈테판 소베스트르(Stephen Sauvestre)에게 타워 디자인을 발전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소베스트르는 타워 기단부에 거대한 아치(arch)를 비롯해 몇 가지 장식을 더했다. 에펠은 수정된 설계안이 마음에 들었던지 세 사람으로부터 디자인 특허권을 사들인 후 대중에 공개했다. 에펠은 에펠탑에 대해 프랑스혁명 이후 등장한 산업과 과학 그리고 현대 공학의 예술을 통해 탄생한 기념비라고 자평하며, 프랑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건설될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 달리 에펠은 동시대 예술인들과 지식인들의 혹독한 비판에 맞서야 했다. 사실 에펠탑 건설 초반에는 300m 높이의 구조물이 정말 지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의견도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워가 점점 올라갈수록 ‘300명의 위원회(Committee of three hundred)’가 구성되었고 ‘에펠탑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이라는 탄원서가 노동부 장관에게 제출됐다. 에펠탑을 혐오했던 예술가 중 대표적인 인물이 소설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이다. 모파상은 자신의 단편《방랑생활(La vie errante)》에서 사람들이 이르는 곳 어디에서나 에펠탑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생각 가능한 모든 물건 속에 들어 있으며, 모든 쇼윈도 안에 전시되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악몽이라고 비평했다. 모파상에게 에펠탑은 “철제 사다리로 만든 비쩍 마른 피라미드”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에펠탑에 대한 오랜 논쟁의 중심에 건축과 공학의 관계가 있다고 봤다. 실제 에펠탑을 반대했던 위원회를 이끈 인물은 파리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한 찰스 가르니에(Charles Garnier)였다. 가르니에는 에펠과 함께 니스 천문대를 설계했지만 에펠탑 건설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예술가들과 문학가들이 에펠탑에 대한 건축과 공학 간의 관계를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건립 반대 탄원서나 모파상의 글을 보면 파리 어디서나 보이는 지배적이고 독보적인 존재의 등장을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 이후 100년간의 프랑스 역사를 훑어보면 그들의 거부반응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루이16세(Louis XVI)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뒤로 프랑스 국민들은 절대권력의 등장을 철저히 경계했다. 하지만 왕정 폐지 후 시작된 제1공화국으로 등장한 인물은 절대권력을 넘어서는 나폴레옹(Napoleon I)이었다. 그는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가 됐다.


나폴레옹 실각 후 집권한 부르봉 왕정에 대해 국민들은 다시 적대감을 드러냈고 결국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폐지됐다. 1848년 노예제 폐지와 함께 남성에 한하기는 했지만 선거권이 부여됐다. 그리고 프랑스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은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였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던 그도 프랑스 제2제국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나폴레옹 3세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제3공화국이 설립됐다(1870년).

제3공화국은 프랑스 혁명 이후 처음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된 정치 체제라는 평가를 받지만 시작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출범 후 9년간 제3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해야 했던 국회는 갈팡질팡했다. 심지어 왕정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도 있었다. 왕당파들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군주가 대통령이 되는 것과 정부 체제를 공화국에서 다른 체제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은 1884년 8월 14일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에펠탑은 군주정과 공화정을 오갔던 정치적 혼란이 비로소 마무리된 시기에 착공됐다. 헌법이 통과되고 정치적 안정이 시작됐음에도 프랑스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에게 파리 도처에서 보이는 에펠탑은 자신들 위에 군림했던, 시민들 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특권을 누렸던 절대권력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펠탑이 건설되는 과정은 에펠탑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왕정을 폐지하고 도달하고자 했던 근대 시민사회의 속성을 보여준다. 에펠탑은 그전까지 도시를 상징했던 다른 랜드마크(Landmark)처럼 절대권력의 취향과 결정으로 지어진 구조물이 아니다. 에펠의 믿음처럼 에펠탑은 계몽주의 이후 등장한 과학과 산업의 산물이다. 탑의 건립과 디자인은 공개적으로 진행된 응모 절차와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위원회의 평가를 통해 결정됐다. 건립 과정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이 또한 시민사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오히려 그런 논쟁 속에서 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이자 가장 파급력 강한 예술적 오브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시민은 에펠탑을 만들고 운영하는 주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타워 디자인 특허권, 운영 및 수입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계약과 같은 근대 시민사회의 질서들이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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