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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혜임 Sep 21. 2023

렘브란트의 성공과 좌절

삶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반복된다

    렘브란트는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처음으로 그림과 작가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었던 첫사랑과 같은 작가이다. 대학에서 불어를 공부하고 있었던 시절 나는 당시 유행하던 어학연수로 프랑스를 택했고 관광 겸 여러 도시를 여행 다니며 미술관을 방문하며 다양한 그림들을 보았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프랑스의 작은 소도시 미술관에서 나도 모르게 음영의 대조가 큰 밝고 따뜻한 빛이 화면을 밝히고 있는 어떤 화가의 초상화 한참을 서 있었다. 당시 그 미술관 안에는 긴 벤치가 놓여 있어서 앉아서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고 한 노부부가 다정히 앉아서 두 손을 꼭 잡고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 방안에는 비슷한 초상화들이 많이 있었지만 유독 그 그림만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렘브란트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의 그림과 사랑에 빠졌다.


그림과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 나는 화가와 그림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대학원에서 진학해서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대학원을 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졸업할 2004년 당시 인문학을 공부한 여자가 취직하는 것은 정말 힘든 시기였다. 대학 동기 친구들을 100개 이력서를 보내도 인터뷰 연락조차 받지 못했었다. 먼저 졸업해서 대기업에 다니고 있던 오빠는 나에게 여자로서 큰 회사를 다니면서 인정받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다며 나에게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조언해 주고 적극 지원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오빠의 도움 덕분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불어를 전공했던 나에게 미술사는 낯설면서도 너무나 설레는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인상주의 작가 모네에 대해 석사졸업 논문을 쓰고 싶었으나 현대 미술 작가에 대해 논문을 써야지 갤러리에 취직하기 쉽다는 얘기를 듣고 프랑스 현대 미술 작가인 이브 클랭에 대해 석사논문을 쓰고 지금처럼 미술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2008년 강남의 한 갤러리에서 아트 컨설턴트로 일을 시작하였다.


내가 일을 처음 시작했던 회사는 큰 금액을 투자해서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기업형 미술전문회사로 당시 갤러리가 거의 없었던 삼성동에 한복판에 1천여 평의 규모에 전시, 경매, 아트컨설팅 등을 통해 미술 투자를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미술 시장에서 이슈가 되었던 꽤 큰 갤러리 었다. 전문 기업이 투자하고 기획해서 만들어진 미술전문 회사에서 나는 해외 아트페어에 가서 그림을 사 오는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며 전 세계 아트페어와 유명 갤러리들을 다니면서 많은 작가와 갤러리스트들을 만나며 견문을 넓혔다. 40여 명이 넘는 직원들과 경쟁하며 나는 공공미술품 아트 컨설팅 그리고 에디션과 가구전시 및 미술 투자에 대한 강의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미술시장의 단면들을 많이 보았다. 그렇게 약 십 년간 일하면서 미술 시장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많은 화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삶과 질투 고뇌 등 여러 면들을 보았다. 렘브란트의 그림과 삶을 들여다보며 내가 만났던 화가들의 모습과 렘브란트의 삶이 겹쳐지며 3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빛과 어둠의 대가로 유명한 렘브란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화가로써의 성공의 빛나는 모습과 새로운 도전과 실패 그리고 대중에게서 외면당하고 서서히 잊혀진 어둠의 모습을 보여준 작가이다.


빛과 어둠이 대조되는 그의 그림처럼 그의 삶 역시 빛과 어둠이 대조되었던 작가이다.


역사와 시대에 따라 비슷한 모습들이 존재하듯이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네덜란드에서 살았던 렘브란트의 모습을 통해 동시대에 존재하는 미술투자 광풍과 미술시장의 흐름등의 미술계의 여러 가지 특징등이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대와 장소와 상관없이 미술로 성공하는 것은 여전히 너무 힘든 일이다.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아무리 유명한 화가라도 원하는 모든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명해질수록 화가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기대가 커지고 그를 둘러싼 미술 시장의 환경은 더욱 복잡해진다. 화가들이 전시를 할 때마다 전속 갤러리의 조언에 따라 작품성과 대중성 그리고 시장성 까지도 고려해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다면 미술관이 전시에 관련된 비용을 지원하고 작품을 팔아주진 않지만 전시를 통해 이름을 알려주기 때문에 전시 주제와 작품성 그리고 평론가들을 신경을 써야 한다.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판매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작품을 사는 대중의 취향을 반영해야 한다. 또한 화가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과거의 작품들과 싸워가면서 새로운 더 좋은 작품들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한 가지 스타일이 전시를 통해 작품이 다 팔릴 정도를 인기를 끌었다고 해서 계속 같은 스타일의 그림만을 그린다면 평론가들을 그의 작품을 과거의 답습이라며 혹평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시도해서 전시를 하게 되지만 대중들을 오히려 잘 알려지고 많이 보았던 그의 예전 스타일을 선호해서 그림이 하나도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16세기 당시에도 유명한 작가였던 렘브란트 역시 같은 일을 겪었다.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와서 수많은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부와 명성을 쌓으면서 승승장구했던 렘브란트는 1642년 <야간 순찰대(The nightwatch)>라는 작품을 그렸으나 그림을 의뢰한 사람들과 대중들의 악평을 받고 명성을 잃고 추락하게 된다. 특히 그에게 100 길더라는 당시 노동자들의 4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을 주고 그림을 의뢰했던 민병대 대원들 중에는 그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은 더 컸었다.

렘브란트, 야간 순찰대, 1642

2년 전 렘브란트를 암스테르담의 평론가들과 부자들에게 유명하게 만든 <해부학수업>이라는 다른 단체 초상화를 보면 민병대 대원들이 왜 불만이 컸는고 사람들이 렘브란트의 신작을 안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서는 무역으로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변호사 의사, 지리학자, 군인들 시민 계층이 부유해지면서 성장하는 시기 었다. 이 그림은 니콜라스 튤립이라는 외과의사가 호기심 사람들 앞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는 수업의 모습을 그린 단체 초상화다. 멋진 옷을 입고 섬세한 손짓으로 인체를 해부하는 박사의 제스처와 그런 모습을 보는 남자들의 모든 표정과 시선이 살아 있는 듯이 표현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교양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들었던 인체 해부학 수업이 진행되는 모습을 그림 그림이다.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아니 당시에도 개인 초상화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같은 계급주의 사회에서는 돈 많은 귀족들만에 즐기며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돈과 땅과 시간이 많은 귀족들은 자신들의 화려한 모습들을 유명한 화가들을 고용하여 초상화로 남기는 것이 그들만의 플렉스 문화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돈 많은 신흥 부르주와 계층이 성장하고 청교도가 퍼지면서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귀족들처럼 자신들의 부유하고 화려한 모습들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 유행처럼 퍼졌다.


렘브란트, 해부학 수업<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 1632

당시 부유층들에게 초상화를 유명한 화가에게 의뢰해서 그리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SNS에 명품으로 치장하고 전용기를 타고 가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올려 자랑하는 것처럼 자신의 부를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유행하는 플렉스였다.  <해부학수업>을 통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멋진 초상화를 그린 렘브란트는 바로 이름을 널리 알리며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초상화를 의뢰하는 화가가 되었다. 즉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제일 잘 나가는 화가로 부와 명성을 쌓고 승승장구하며 빛과 어둠을 강조한 자신만의 스타일의 그림들을 그려나갔다.

렘부란트가 그린 다른 초상화들

하지만 렘브란트는 당시 암스테르담을 대표하는 시회의실에 걸릴 4m가 넘는 민병대의 그림에서 예전과 다른 파격적인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로 표현했다. 과거의 자신의 스타일을 버리고 새로운 단계로 나가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동감 있고 멋진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했었던 사람들은 그의 새로운 스타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뒤 돌아 섰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초상화 주문이 들어오지 않고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제일 잘 나가는 화가가 유명 갤러리에서 자신감 넘치는 새로운 시도로 전시를 했는데 작품이 하나도 팔리지 않고 대중들이 예전 스타일을 찾은 경우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전시가 열리기 위해서는 화가도 재료비 등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고 갤러리 역시 공간과 마케팅 홍보 비용이 필요하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전시를 했는데 작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작가도 갤러리도 손해다. 게다가 그 전시와 신작이 별로였다는 소문이 퍼져서 대중들이 더 이상 그를 찾지 않고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지금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힘겨워하던 렘브란트는 그의 정신적 경제적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던 부인 사스키아가 같은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더 깊은 정말에 빠지게 된다.

Rembrandt, Portrait of Saskia van Uylenburgh,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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