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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든 Nov 30. 2019

정화

백구 잡문집

정화



  아버지는 하수처리 공무원이었다. 우리 가족은 하수종말처리장 옆 사택에서 내가 11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오줌을 비롯한 오폐수는 하수종말처리장을 거쳐 다시 쓸 수 있는 정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 오줌을 싼 사람들은 바다를 보러 왔다가 근처에 하수종말처리장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곧장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틀어막았다. 혐오 시설이나 님비와 같은 단어들이 들려왔다. 더러운 것을 정화하는 사람과 시설이 더러운 취급을 받는 것이 좀 억울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무던했다. 충분히 행복했으며 사진도 많이 찍었다. 우리의 거주 공간을 기피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순전히 바깥 사람들의 몫이었다.




사택은 가동부터 마동까지 총 다섯 개의 베이지색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였다. 한 건물 당 네 가구가 살았다. 주변에는 대나무가 커튼처럼 쳐져 있었고, 입구에는 둥근 향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심어져 있었다. 집들이 붙어 있다 보니 사택에 사는 공무원들은 자연스레 술친구가 되었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소꿉친구처럼 친했다.


사택에는 무성한 잔디와 클로버, 민들레가 자랐다. 그 사이로 수많은 도마뱀과 콩벌레가 유연하게 풀길 사이를 헤엄쳤다. 그들에게 우리는 자연재해 같은 존재였다. 움켜쥐면 도마뱀은 재빠르게 꼬리를 끊고 달아났고, 콩벌레는 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스스로를 보호했다. 도마뱀의 남겨진 꼬리가 손가락을 말아쥐는 모습이나 콩처럼 변한 콩벌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구슬 치듯 탕 튕겨내던 손의 감각을 아직 기억한다. 이제는 징그러워서 잡지 못하는 것들 혹은 단숨에 죽여 버리는 것들을, 그때는 징그러운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가지고 놀았다.


벌레를 괴롭히는 것에 신물이 나면 마을에 있는 놀이터로 갔다. 그곳은 우리의 작은 에버랜드였다. 가동 아들내미부터 라동 딸내미까지 모두 모여 해가 질 때까지 그네를 탔다. 힘껏 발을 굴러 정점에 다다르면 대나무 울타리 너머로 바다의 지평선이 잠깐 보였는데, 다들 그 순간을 좋아했다. 다만 그것은 꽤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으므로, 겁 없는 녀석들만 가질 수 있는 귀여운 권력 같은 것이었다. 겁쟁이인 나는 해수면이 보이는 높이까지 차마 발을 구르지 못해 겁 없는 녀석들이 전해주는 바다의 풍경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막 빨갛게 물들고 있어." 그네를 탄 아이가 말해주면, "지금은? 지금은?" 하고 다음 묘사를 재촉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차오르다 이곳저곳에서 엄마들의 부름이 들려오면, 하나 둘 도마뱀처럼 말꼬리를 자르고 콩벌레처럼 후다닥 기어 들어갔다.




하수종말처리장에는 커다랗고 둥그런 은색 하수종말처리기계가 있었다. 혹자는 그것을 혐오 시설을 대표하는 흉물처럼 여겼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바다만큼 좋았다. 높은 아파트는 찾아볼 수 없었던 우리 동네에서 그 풍선같이 탐스러운 구조물은 독보적으로 컸고 심지어 우아했다. 그것은 이상한 상상에 빠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를테면 언젠가 저것이 공처럼 굴러와 우리 마을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거나, 지면과 함께 두둥실 떠올라 마을을 하늘로 날려버린다는 식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에게 그것에 대해 물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똥통'이라고 불렀다. 별칭이었으나 나는 정말로 그 안에 똥이 들어있는 줄 알았다. 충격이었다. 그렇게 큰 것이 똥으로 가득 차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똥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곳까지 지독한 냄새가 퍼졌어야 정상인데 그렇지도 않았다. "에이, 거짓말!" 어린 내가 뾰로퉁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똥을 아주 많이 싼단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마을은 바깥 사람들의 말대로 기피 지역이 맞았다. 오폐수를 처리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악취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것은 그곳에 살면서 내가 한 번도 악취 때문에 마음 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네 몸에서 똥냄새 나." 하고 충분히 놀림 받았을 법도 한데,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촌동네 바닷마을이라 부모님의 직업이 다 거기서 거기였고, 자식들 역시 다 거기서 거기였다. 다 같이 못 사는지라 못 사는 것이 특별한 놀림거리가 안 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현명했다. 그들은 내 앞에서 거주환경에 대해 불평하거나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아마 의도적으로 그랬을 것이다. 분명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그 거대한 똥통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텐데, "으~ 똥 냄새." 하고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나를 웃겨줄 뿐이었다. 그들은 농담을 잃지 않는 어른이었다. 그들이 해주는 똥 얘기는 언제나 웃기고 조금 슬펐다.


하수종말처리장 공무원들은 아이들의 마음 속 때가 탈 수 있는 것들을 정화 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오물을 정화해 행여 더러워질까 조심조심 앞바다로 정수를 흘려보냈는데 그런 직업정신을 아무래도 우릴 키우는데 더러 발휘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정말로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있는 눈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마음에 오물이 쌓일 때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들춰본다. 사진 속 나는 똥통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나도 그때의 부모님처럼 필름카메라를 쓴다. 최근에 쌓여있던 필름을 모두 현상했다. 스캔본을 한 장 한 장 확인하다보니 글이 쓰고 싶어져서 펜을 꺼내 영수증에 대고 막 휘갈겨 썼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이라 '더 써야한다'를 '더 싸야한다'로 잘못 썼는데, 큰 이질감은 없었다. 사진도 글도 내 똥이라 생각하면 마음에 평온이 온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나는 더 싸야한다. 쌀 수 있다.  <끝>



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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