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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든 Nov 30. 2019

대전

백구 잡문집

대전


  그건 내 첫 소개팅 자리였고, 우리는 취했고, 평소에 무엇을 하고 지내냐는 간단한 질문에 나는 시를 쓴다고 대뜸 진지하게 말해버려서, 그녀로 하여금 왜 시를 쓰냐는 질문까지 꺼내게 만들고 말았다. 5월의 여름, 대전이었다.


우리는 이 영역에 발 디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경과 동정을 동시에 받아야 해요. 나는 그렇게 운을 떼었다. 물론 내가 그들만큼 시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하고 괜히 한 발짝 떼어도 보았으나, 그 질문에는 언제나 성의를 다하고 싶었다.


내가 시인은 아닐지언정 나라는 인간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그러니까 내 삶의 작동법에 대해 물어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는 내가 대전을 떠나기 전까지 두 번의 만남을 더 가졌다. 그녀의 궁금증은 의중과 관계없이 늘 순수해보였고 어쩔 땐 숭고하기까지 했다. 물론 우리는 매번 취해있었는데, 삶에 대한 질문들은 좀 장난 같을 때, 그래서 농담같이 가볍게 대답할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와 너였다.




며칠 뒤 그녀와 카레를 먹기로 했다. 나는 대전하면 성심당의 튀김소보로 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대전토박이인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우리가 간 곳은 전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로 아래 작은 서점이 보이는 카레전문점이었다.


음식이 나오고 평소에 무얼 하고 지내냐는 질문에, 어제는 오전에 책상에 앉아 쓰던 시에서 ‘오해’라는 단어를 ‘이해`로 고쳤고, 오후에는 그걸 다시 ‘오해’로 돌려놓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카레를 먹었다.


그녀는 최근에 산 시집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딱 한 권 구매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신간 시집을 출간하는 작가라고 말해주었다. 내게는 그 작가의 신간이 어떠한 생존신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나 살아있어요, 안 죽을 만큼 먹고 쓰면서, 당신의 사랑 없이도 거뜬히, 라고 시집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괜히 허풍도 떨어보았다.




우리는 2차로 술을 마셨다. 아마 둘 다 아사히 아니면 삿포로 맥주였던 걸로 기억한다. 술의 종류는 모르겠으나 그때 내가 놓아진 술을 반쯤 비우며 너무 말이 많았음을 후회한 사실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우리는 밤거리를 좀 걷다가 그녀가 다니는 대학 안 벤치에 앉아서 키스했다. 둘 다 이 키스 이후에 다시는 볼 일이 없음을 직감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조금 걷다가 정문으로 나와 그녀를 택시 태워 보냈다.


나는 택시가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휴대폰 메모 앱에 일기를 썼다. 카레, 맥주, 택시…… 다 노란색이네. 왜 노란색이지?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나? 아니, 없었지. 그런 건 없었지. 우리는 왜 만났더라? 아. 그래, 소개팅이었지. 필연적인 이유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소개팅이었지.


의식이 흐르는 대로 적고 있는데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뭔가 얘기는 많이 나눈 것 같은데 정작 너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느낌이네.”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 말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소개팅이란 건 참 어렵구나…… 너를 알지만 너를 몰라, 라니.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나에게도 한때는 죽고 못 사는 애인이 곁에 있었다. 그녀는 시가 되고 일기가 되고 그런 다음 떠났다. 어쩌면 내가 떠나고야 마는 사람에게만 마음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나에 비해 너무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종종 그녀에게 내 시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늘 “너를 잘 모르겠어. 네가 쓴 시는 더더욱.” 하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모른다고 말해주는 게 좋았다. 다들 내 시를 통해 내 마음까지 이해해버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곤 하는데, 그녀는 늘 예술과 나를 분리시키며 어느 쪽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버리니 나로선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시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더할 여지는 없어보였다. 나는 너만 보면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너를 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좋았기 때문이다. 너는 낭만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이유로 낭만적인 글을 쓰고픈 나에게 최악의 환경이었다.




다만 인생을 살다보면 시를 토해내게 만드는 환경에 노출되기 마련이고, 나는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혼자 굴속을 파고드는 두더지로 퇴화해갔다. 연락하는 것에 재능이 없는 나였고, 그녀는 많이 섭섭해 했다. 우린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기에 싸운 뒤에 화해하는 법도 몰랐다.


애인은 “글 쓰려고 나 만나는 거야?”하고 물었다. 거기에는 순수한 호기심과 약간의 혐오가 뒤섞여 나를 침묵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젠 지쳤다고 말하는 애인 앞에서,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기억하려 애썼다. 휴대폰에 적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직감한 순간에도 네 진심을 문장으로, 우리의 삶을 문학으로 바꾸는 나는 죄인이다.


내가 애인에 대해 너무 많이 써대는 바람에 우리는 신선함을 잃어 버렸다. 애인이면서 시일 수는 없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소중한 여자를 잃고 가난한 시를 얻었다. 아니, 둘 다 잃고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 착각했다.  <끝>



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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