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알아본 웰다잉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성공한 법관으로 집안의 자랑거리이다. 법률학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정도로 똑똑하고 사교적이고 예의도 바르니, 공부면 공부 인성이면 인성 뭐하나 빼놓을 것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이반 일리치는 지방에서 특별 보좌관으로 일하고 도시로 옮겨 예심판사가 되기까지 일도 잘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반 일리치는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 판단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았다. 배우자를 만날 때에도 고위층 사람들이 ‘그 여자 정도면 괜찮지’라고 하는 여자였기에 현재의 아내를 선택했으며, 자신도 자신의 지위와 명성에 적당한 여자를 선택하였다. 잠시 육아와 아내의 집착 그리고 수석 판사직 자리를 두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괴로워하는 때가 있었지만, 자신이 꿈꾸던 연봉5000루블짜리 자리를 얻게 되면서 컨디션은 항상 최상, 기분도 항상 최상인 상태도 지내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삶은 가볍고 즐겁고 품위 있게 흘러가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살았으며 맡겨진 공적 업무로 자존심을 챙기고 사교계 생활로 허영심을 채우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나게 집안을 꾸미고 있던 이반 일리치는 답답하게 구는 도배공에게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이려고 의자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옆구리를 다치게 된다. 처음에는 별 탈 없었으나 몸에 문제가 생겼고, 이는 죽음 앞으로 이반 일리치를 끌고 가는 계기가 되었다.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이반 일리치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반 일리치가 겪은 고통과 죽음의 과정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아내는 이반 일리치가 죽자 정부의 지원금을 더 받는 것을 고민하고, 동료들은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자신의 자리를 계산하고, 의무감으로 문상을 가며 카드놀이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인다. 주변인들의 이러한 모습은 죽음 전에도 보였는데, 고통 속에 있는 이반 일리치에게 헛된 희망을 주는 위로만을 던질 뿐, 계속하여 자기 자신만 신경 쓰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대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겉으로 품위를 지키려는 분위기와 위선, 거짓을 증오하였다. 하지만 자신도 그들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왔으며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며 기만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미 죽음 앞에 서 있는 이반 일리치는 바로잡을 시간도 기회도 없는 상태였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고와 반성을 반복한 끝에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모두를 괴롭히고 있었으며 내가 죽으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가족들에게 사과(‘용서해줘’를 ‘보내줘’로 잘못 발음하긴 했지만)를 하고 죽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나름 정도를 걷는 인생을 살고 싶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 주변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를 애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반 일리치의 삶은 무의미하고 어그러진(실패한) 삶일까? 이반 일리치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죽었는데 과연 웰다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패한 삶, 성공한 삶을 구분 짓기에는 가치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일 수 있다. 누군가는 법관으로 승승장구한 그의 삶을 보고 ‘성공한 삶이었다.‘고 할 것이며 누군가는 기만과 거짓이 가득한 그의 삶을 보고 ’실패한 삶이었다.‘고 할 것이다. 삶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죽기 전에 인생을 돌아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 삶의 회고와 반성을 통해 삶을 정리할 시간을 얻었다는 것은 성공과 실패를 넘어 의미가 있는 경험이다.
돌이킬 수 없을 때에 비로소 자신의 삶의 잘못된 부분을 알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후회되는 부분도 해결(가족들에게 사과)을 했으니 이반 일리치는 웰다잉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통과 고독 속에서 죽어갔는데 웰다잉이라고 할 수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다. 신체적 고통과 같이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의 과정일 뿐이다. 죽는 과정, 모습만을 통해 좋은 죽음을 정의한다면 호스피스 밖에 답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 전체를 보았을 때 웰다잉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삶의 의미의 유무와 삶에 대한 회고와 반성을 통한 의미의 재발견이기 때문에 이반일리치는 웰다잉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반 일리치처럼 삶의 모습을 반성하거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는 없다. 또한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가 같은 모양일 수 없다. 따라서 삶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죽음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처럼 삶을 정리하고 죽는 것 또한 웰다잉이지만, 어떠한 가치관과 목표로 살았는지도 매우 중요하며 자신의 삶의 의미에 맞게 잘 살다가 죽었다면 이것이야말로 웰다잉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삶이 곧 죽음이고 웰빙이 웰다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것(호상)이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은 죽음은 삶의 의미와 그 과정에 있기에 우리는 인생에 대한 고찰의 기회를 가지며 삶의 의미를 찾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지금의 노인세대는 전쟁을 통해 부모나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 타지에서 가족도 없이 홀로 죽는, 죽을뻔한 경험을 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한 맺힌 죽음의 경험은 세대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와 좋은 죽음이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방해하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게 한다. 따라서 삶을 주제로 다루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웰빙의 상태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웰다잉의 과정에 이르도록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내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삶에 대한 의미를 고민하고 자신만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은 웰빙에 큰 도움이 되며 웰다잉도 가능케 만든다. 따라서 청소년, 청년들에게도 인생에 대한 고찰을 돕는 교육을 제공하여 웰빙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료 판사인 뾰뜨르처럼 “나는 아니라서(안죽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죽음은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이반 일리치의 아내처럼 죽은 이를 마냥 불쌍하게만 생각한다. 이처럼 삶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인지 없이 살아가는 것은 웰다잉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뾰뜨르나 이반 일리치의 아내와 같은 모습이 아닌, 게르심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유일하게 이반 일리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게르심이었다. 그는 거의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에게 “누구나 죽는데,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라며 고된 수발을 모두 들어주었다. 게르심은 누구나 죽고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우리도 이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겸허히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