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의 사회복지사이다.
1984년 대학을 입학할 당시에 사회복지학과가 전국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35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마치 운전면허증같이 소지하고 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결혼하였다. 바로 출산하여 사회복지현장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 냄새나는 사회복지현장에 대한 그리움으로 2004년도 정신보건사회복지 수련을 받고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정신과 병동내에서 정신보건사회복지사는 마음이 아픈 환자들에게 정신과 전문의와 간호사, 임상심리사와 협력하여 환자들의 사회적 기능을 향상할 수 있는 돕는 일을 하였다.
남편이 이직하게 되어 남양주시에 정착하게 되었고, 공공기관 소속 통합사례관리사로 2012년 5월부터 일하기 시작하였다.
통합사례관리사란 지역의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발굴하고, 이용자에게 민관기관들과 협력하여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지역의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협력자, 조력자, 옹호자의 역할을 하는 전문가이다.
내 나이 48세에 공공기관에서의 사회복지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공적부조의 자격요건과
지역기관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 연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사회보장 정보시스템의 매뉴얼이 부담스러웠다.
나이가 많아 업무에 뒤쳐진다는 말을 듣기 싫어 초과근무를 밥먹듯이 하였으며 지역기관 담당자들과 업무협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특히 어려운 이웃들의 초기상담과 그분들의 상황을 위기도 척도를 통해 욕구 상황을 파악하고. 장단기 목표를 설정하고 지역의 기관들의 자원을 매칭 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알고 있지도 상상도 못 할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만나서 현재의 어려움을 집중해서 들어주고 , 판단하지 않고 공감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많은 분들이 경제적인 부분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으며, 정신적인 어려움, 가족 구성원의 가출. 알코올 중독 등등으로 수많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용자와 필요한 정보를 나눈 후 해결을 위한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례회의를 거쳐 이용자를 옹호하고, 기관과의 역할분담을 조정하고, 모니터링하는 일련의 과정을 사회보장 정보시스템에 찬찬히 입력하는 것은
경력단절 후 공공기관에 첫발을 내딛는 50대를 바로 앞둔
나에게 버거웠다.
내 가족의 식사는 못 챙겨도 이용자의 의식주 관련 일상생활을 민감하게 생각하고, 내 병든 부모님의 병원동행은 못해도 이용자의 신체적 ㆍ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해 병원을 함께 방문하였다.
또한 남편의 폭력을 피하여 모텔에 피신한 세 모녀에게 안정적인 거주지를 마련해주고, 삼복더위에 고시원에서 아이를 출산한 17세의 여학생을 산후조리받을 수 있도록 자원을 연계하고, 자녀를 양육하겠다는 20대 초반에 아빠가 된 청소년을 취업시키고 주거를 마련하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온 지역을 헤집고 다녔다.
최근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홀로 쪽방 혹은 고시원에서 거주하는 이용자가 늘고 있다.
이웃들의 의뢰로 그분들의 고단한 삶에 개입하면, 아무리 객관적인 관점에서 계산된 거리를 두고 공감한다 해도 의존적인 성향을 보이는 분들이 간혹 있다.
하루에 50~60번 거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를 한다.
물론 그중에 자활에 성공하여 고맙다는 이용자도 있고, 남편의 자살로 실의에 빠진 이용자가 몇 년 동안의 각고의 노력으로 공무원에 합격했다는 가슴 벅찬 이야기도 있기도 하지만 극소수일 뿐이다.
이러한 일을 한지 햇수로 10년이 되니 어느 순간 내속에 내가 없게 되었으며,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면장애와 짧은 잠을 자면서 급기야 잠꼬대가 매우 심해지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이 근육통이 왔다.
또한 이용자에게 전화만 와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이용자의 말에 집중할 수 없게 되어 급기야 협력 의료기관인 신경정신과 전문의에게 상담을 요청하게 되었다.
담당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한 우울 소견을 보인다며 병가를 권유하였다.
부푼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복지 최일선 현장에서 고전 분투하였던 슈퍼 울트라 짱 대한민국의 초강력 사회복지사가 햇살 가득한 11월 초 어느 날 패잔병 같은 심정으로 정신과 병원문을 나서게 될 줄을 그 누가 상상했을까!
이러한 나의 상황을 전해 들은
대부분의 많은 동료들은 마치 본인의 상황인 것처럼 걱정을 해주었지만 '누가 저렇게 열심히 하라 했어, 내 저럴 줄 알았다'는 극소수의 동료들의 쓴소리들이 나를 더욱 서럽게 하였다.
두 달 동안의 병가기간 동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병가기간 홀로 있는 그 시간에 고독의 길을 걷고 싶었다
오지랖 여사의 내면 깊은 속에 억압된 감정과 마주하고 싶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우울하면 우울한대로, 무기력하면 무기력한 대로 남의 마음 살피느라 못 돌본 내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러한 마음을 소리를 브런치에 담고 싶어 기고하였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이 한마디가 가슴을 벌렁이게 할 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