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을씨년스러운 3월의 꽃샘추위에 그를 만나다.
금년 꽃샘추위는 코로나 19로 인해 유난히 옷깃을 더 여미게 만들었다.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3월의 어느 날 이주무관한테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행정복지센터 근처 행복 고시원에 사시는 분인데 고시원비가 4개월이나 밀려 쫓겨나게 생겼다고 내방하신 분이 계신데, 몸도 안 좋아 보이고, 말도 어눌한 분인데 한번 상담을 부탁해도 될까요?”나는 마침 오후 일정이 그분이 사시는 행복 고시원 근처라며 약속을 잡아주면 상담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하였다.
엊그제 상담했던 분도 고시원에서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중년의 남성분이셨다. 대리운전이 건수가 없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셨는데 오늘 만나는 분도 고시원에 계시는 분이시네... 하루가 다르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이 많음을 고민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그분이 거주하고 있는 고시원에 도착하였다.
허우대 멀쩡한 180센티에 고선정 씨
고시원은 12층 건물에 6층에 위치해 있었다. 그분이 있는 고시원은 두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행정복지센터에서 담당자가 방문을 한다고 하니 꽤나 신경이 쓰였나 보다 서둘러서 정리한 티가 나 있었다. 이곳에서 거주한 지 5개월 정도 되어 묵은 짐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합판으로 만든 침대와 책상, 벽면 옷걸이에는 몇 벌 되지 않은 옷과 야구모자가 두 개 걸려 있었다.
침대 밑 바구니에는 속옷과 양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키가 180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고선정 씨는 허름한 나이키 운동복 바지와 실밥이 터진 얇은 회색 후드 티에 검은색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까만 마스크를 쓴 선정 씨는 잔뜩 긴장된 눈빛으로 나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였다. 낯선 사람을 만나 본인의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수치심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그분이 최대한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안녕하세요? 통합사례관리사 이한나라고 합니다. 이주무관님이 고선정 씨와 상담 중에 어려움이 있으시다고 해서 만남을 요청드렸습니다.”이렇게 나를 소개하자 고선정 씨는 쑥스럽게 인사를 하면서 “저~저기요. 고~고시원에서 쫓겨나면 가~갈 데가 없어요. 고시원 초~총무님이 그~그나마 도와주셔서 봐~봐주신 거예요.”고선정 씨의 절박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고선정 씨와 만남이 시작되었다.
40대에 뇌경색을 앓고 있는 고선정 씨
이주무관의 말대로 고선정 씨는 말이 매우 어눌하였다. 더듬거리면서 매우 천천히 말을 하여 혹시 지적장애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당장에 고시원비도 문제지만 2년 전 경동맥에 실핏줄이 터진 것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뇌경색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었다.
이로 인해 언어 장해가 왔으나 돈이 없어 병원도 가지 못하고 또한 고혈압도 있는데 약을 먹지 못하여 머리가 계속 아프다고 하였다.
나는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물었다. 고시원 주방에 밥과 김치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고선정 씨는 일용직이라도 하려고 구직활동을 하였지만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일자리가 있어도 혈압이 높아 막노동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더듬거리며 말하였다. 간혹 고시원을 퇴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퇴소 후 사용한 방을 청소해 주는 대가로 2만 원 정도 받았다고 하였다.
그 돈으로 편의점에서 필요한 식품을 사서 끼니를 때우기도 한다고 하였다. 당장에 고시원에서 쫓겨나게 되면 갈 데가 없어서 조금만 도움을 주면 일거리를 찾아보겠다며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고선정 씨에게 통합사례관리대상자 선정 절차에 대해 설명하였다. 통합사례관리대상자로 선정이 되면 고선정 씨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장단기 목표를 함께 세우고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함에 대해 설명하였다.
아울러 긴급생계비가 3개월 정도 지원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고선정 씨는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고선정 씨가 지금 당장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었다. 고선정 씨는 “라면 몇 개만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하였다. 몇 주 동안 밥과 김치만으로 끼니를 때운 것이 힘들었나 보다. 일단 고선정 씨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라면이 지역기관에 보관이 되어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하였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복지관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였다.
기관에 라면이 있는지... 다행이다. 어제 들어온 라면이 몇 박스가 있다고 하였다.
반 박스만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담당자는 흔쾌히 지원해줄 수 있다고 하였다.
고마웠다. 한결같은 담당자의 유쾌한 OK 사인은 늘 정겹고 일을 하는데 활력을 가져다준다.
며칠 후 사례회의를 하였다. 다양한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고선정 씨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면 큰 의미가 있겠다는 회의 참석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고선정 씨의 고시원 옆방 지인에게 전화를 하였다.
왜냐하면 고선정 씨는 전화가 끊긴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고선정 씨 내일로 향하는 희망 전차에 시동을 걸다.
고선정 씨에게 우선적으로 긴급지원을 신청하도록 필요한 서류를 안내하였다.
긴급지원금으로 밀린 고시원비 일부를 납부하고, 우체국 공익재단에서 지원금을 신청하여 매월 일정한 금액을 지원받아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고선정 씨는 지원받은 금액을 계획에 맞추어 지출하려고 애를 썼다. 고시원장에게 밀린 고시원비를 나누어서 납부할 수 있도록 본인이 조율을 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고혈압약도 복용하자 두통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고용복지플러스센터 자립지원 상담사와 구직상담을 받는 것은 어떠한지 의견을 묻자 상담을 원해 동행 상담을 하였다.
상담을 해보니 고선정 씨는 신체적 핸디캡으로 다소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자립지원 직업상담사는 마을 택배 협동조합에 고선정 씨에게 소개하였다.
예전에 본인이 택배 관련 일을 한 경험이 있다며 매우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말도 어눌하고, 보행에도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제대로 작업을 할 수 있을지 근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하루 3 시간씩 구직에 앞서 몸과 마음을 만드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시작하는 것이 어떠냐며 설득하자 고선정 씨는 이력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준비하면서 내일로 향하는 희망 전차에 시동을 걸 수 있게 되었다.
내일로 향하는 희망 전차에 몸을 싣고서...
더운 날, 낮이 궂은날 고선정 씨는 성실하게 택배 일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고선정 씨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토지공사 전세임대주택에 입주자로 선정되어 고시원 방탈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보증금 50만 원도 없어 입주를 포기하려고 하였다.
한국 토지공사에서 보증금과 이사비용까지 지원 결정이 되어 고선정 씨는 내일로 향하는 희망 전차에 몸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따뜻한 방한 칸이 소망이었던 그에게 방두 칸의 행복보다 더 큰 선물은 없었다.
고선정 씨는 생애 이보다 가슴 벅찬 행복한 날들은 없었다고 하였다.
크리스마스이브, 고선정 씨의 따뜻한 안부전화“서~선생님 감사합니다. 서~성탄절 잘 보내세요”
인사 이면에‘선생님 저 잘 살고 있는 거 맞죠?’로 본인의 자랑이 묻어있는 고선정 씨의 자존감 높아진 말 한마디가 내가 통합사례관리사로 살아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