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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gigam May 22. 2023

이배

빛과 어두움, 형태와 공백, 존재와 부재,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숯이라는 물질을 통해 전하는 이배.


조현화랑 해운대 이배 개인전 전시뷰


이배의 숯은 1000도와 1100도 사이의 가마에서 2주간 태워지고 2주간 식혀진다. 불이 지나간 자리엔 나무 고유의 모습과 향 대신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남는다. 이렇듯 단순해진 외형의 내면에는 뜨겁게 지나간 불의 자리와, 그 이후 연장된 시간의 영속성이 담긴다. 숯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변주하듯, 아크릴 미디엄 작품 위로 글씨인 듯 그림인 듯 양의적인 형상이 부유한다. 그려진 형태 위로 반투명 아크릴 미디엄을 바르고 말리기를 세 번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화면에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형상은 흐릿해진다. 이는 회화의 환영을 그려내고 실재의 재현불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형태를 흐리게 그린 추상표현적 변환을 연상시킨다. 다만 재현의 불가능성을 띄는 요소들이 이미지의 근본적 실재에 대한 반영과 부재를 탐구하는 동안 물질적 유한함에 종속되어 왔다면, 이배의 숯 모티브는 시간의 영속성과 어둠 이면의 빛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을 하는 과정 동안 생겨나는 모티브들은 때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를 띠거나 몇 년 전 그린 것과 비슷한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는 의식이 아닌 신체가 담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로, 규칙적이고 꾸준한 태도를 통해 생성되는 과정의 결과물이다. “현대미술은 영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태도나 과정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이배는 화면이 아닌 신체와 외부의 기억을 정제해 가는 과정으로 작업을 하기에 삶 자체가 하나의 화면과도 같다.


조현화랑 해운대 이배 개인전 전시뷰


온몸의 에너지를 부드러운 붓끝에 담아 단숨에 그려내는 붓질 작업 전반에 흐르는 기운생동의 뿌리는 한국 수묵 전통과 맞닿아 있다. 1989년 한국을 떠나 30여 년간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우연히 숯을 만났고, 고국에서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기에, 숯은 작가에게 정체성을 깨닫게 한 매개체이자 한국적 정서를 함축한 상징이기도 하다. 숯의 검은 빛으로부터 찾아낸 다채로움은 먹빛으로 구현되어 온 동양 정신의 뿌리에서 도약하여 현대성과 동시대성을 뛰어넘는다. 수묵 전통 재창안적 매체의 유기적 전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비물질 세계의 영원 속으로 뻗어 올라간다. 까맣게 속을 태우며 빛으로 남은 숯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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