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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gigam May 22. 2023

김홍주

세필붓의 정교한 움직임을 따라 시각적 감각이 촉각으로 변화한다. 솜털처럼 미세한 물감이 공기 중에 부유하듯 투명하게 만개하여 담백하고 솔직한 공감각적 심상을 마음에 남긴다. 세필화 기법의 촉지적 회화 작업으로 잘 알려진 김홍주는, 1970년대 초반부터 오늘날까지 4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업하며 특정 대상에 대한 틀을 가지고 바라보는 시각을 해체하는 것에 주력해 왔다.


조현화랑 김홍주 개인전 전시뷰


일견 김홍주의 다채로운 작업에서 하나의 공통된 근간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1970년대 초, 매체적 실험을 통해 개념미술을 탐구한 ST그룹에 참여하며 작업을 시작한 김홍주는 개울가의 돌을 주워 박스에 넣고 물감을 흘리거나, 천을 벽에 걸어서 먹물이 흐르도록 묻히는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나, 곧 반회화적 경향의 개념미술과 다른 노선을 선택하게 된다. 1974년 회화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청계천의 고물상에서 거울이나 창문틀 등을 사다가 패널을 끼우고 천을 붙여서 그리는 작업을 통해 기존의 회화의 틀에서 벗어나 오브제와 이미지를 결합하는 실험을 한다. 1983년부터는 작은 거울이나 창문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목공소에 맡겨 틀을 제작하고, 화면에 직접 콜라주를 붙이는 등의 작업을 하게 되는데, 왜곡과 중첩 등의 시각적 시도를 통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남기게 된다. 이후 1987년부터 천에 물감을 얇게 칠하는 방식으로, 이미지가 하나의 단위 요소가 되고 이들이 모여 전체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중층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1994년과 1996년 사이, 김홍주는 세밀하고 꼼꼼하게 흙덩이들을 그리면서, 서예 형식의 글자 그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읽을 수 없는 문자와 유사한 형태를 묘사한다. 1996년에는 기존에 연꽃이 가지고 있던 도상학적 의미를 벗어버리려는 시도에서 연꽃 연작을 발표하며 꽃을 그리기 시작한다. 재현 행위와 재현 대상의 관계에 대한 유희적 실험을 하며, 의미 이전의 형태, 의미를 읽기 전 단계의 감상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김홍주의 그림들은 하나로 통한다.


조현화랑 김홍주 개인전 전시뷰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를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회화의 본질을 수렴적인 방식이 아닌 확장하는 태도로 탐구한 김홍주의 작업 세계는 결국 회화로 환원된다. 캔버스나 종이, 조형물 또는 오브제를 바탕으로 물감을 얹어나가는 김홍주에게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프레임을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인 오브제 회화나, 대상의 테두리를 경계 짓지 않은 촉지적 형상 작업으로 환원되는 작가의 열린 태도는 작업의 제목을 짓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하여, 관람객까지 작품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인다. 대상을 설명하지 않고 묘사하며, 판단하지 않고 수용하는 김홍주의 작품은, 특성의 개별적 파악과 조합으로 이해하려는 서구의 합리적 방식이 아닌, 감각을 통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적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세밀한 붓질마다 감각에 대한 경험을 싣는 김홍주의 작품은 무수한 세월의 무게처럼 묵직하다. 어떠한 시류에도 속하지 않고 회화라는 매체를 고집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작업 세계를 구축해 온 김홍주의 세필 붓질 앞에서 말 없는 위로를 받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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