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고 질척한 현실에 관해
나는 똥을 주제로도 글을 쓸 수 있는가? 쓸 수 있다. 똥은 내게 살아있음을 뜻한다. 변을 보고 나서 뒤를 닦고 물을 내리기 전에 덩어리진 내 생명 활동의 증거를 본다. 똥은 내가 먹은 것을 소화해서 살아가는 데에 사용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런 능력이 아직 내게 있다는 감사함을 따라오는, 다른 감정이 또 있다. 똥은 내가 생명체이며,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이 가진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나 명예를 가진 사람도, 결국 음식을 먹고 똥을 싸지 않으면 죽게 된다. 다른 살아있는 생명체를 내 위장에 집어넣어서 대신 희생시킨 다음 그 잔여물을 배설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똥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이 거부할 수 없는 섭취와 방출의 굴레 안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지속하고 있다는 숭고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똥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물질들 중에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런 종류의 혐오감에는 사회적인 합의나 문화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똥은 사농공상이 삼라만상의 순서였던 조선시대에 나름 숭고한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화학 비료가 개발되지 않은 시대에 인분은 농지를 경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영양분이었고, 기피의 대상일 수는 있지만 혐오의 대상은 아니었을 수 있다. 자루에 개를 집어넣은 다음 몽둥이로 패 죽이면 더 맛있는 보신탕이 된다는 한국의 정서 또한, 개를 정신적 동반자로 보는 일부의 다른 국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혐오와 기피는 일정 부분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갖고 살아왔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모든 판단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똥은 기피된다.
왜냐하면, 똥은 인간이 생산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건조한 물성이기 때문이다. 건조하다는 뜻은, 그 개념을 고상한 비유나 이야기를 통해 미화시키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내가 경험한 건조한 물성의 다른 예에는 서울의 50년 된 오피스텔을 개조해 만든 강남역 인근의 누추한 에어비앤비 숙소, 스물한 살의 나이에 삐뚤어진 허리를 갖고 정형외과에 입원해 있는 내 상태 따위의 것들이 있다. 이런 물성, 현실의 부끄럽거나 더럽거나 잔혹한 면들은 우리가 경험하든 아니든 도처에 있다. 칠 평 남짓한 강남역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30년쯤 된 듯한 화장실과 먼지가 가득 쌓인 환풍구, 전날 누군가 파티를 벌이고 나서 치워지지 않은 테이블 위의 빨갛고 멀건 소스 자국들을 바라볼 때, 나는 그곳에 있는 물성을 목도한다. 그런 물성은 지극히 건조해서, 자기 위안으로 덮어볼 수 없는 누추함 같은 것이다.
주변의 본 받고 싶은 사람들 또한 주기적으로 이런 비루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 떠올린다. 짝사랑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좋아하는 이성이 똥을 싸는 장면을 상상하라는 인터넷 밈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면 내 머릿속에서 신성해 보이던 대상은 한 명의 인간으로 축소되고, 그때 우리는 신성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도 각자의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 있을 것이다. 자기 혐오감일 수도 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고귀함은 물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물성과 싸움으로서 증명되는 것이다. 허름한 방 안에서 잠을 청하는 자신의 모습, 부족한 능력, 목표 없는 노력 같은 추한 모습 속에서 물성을 인정하고 버티는 사람은 그러므로 숭고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어른스러움, 또는 진짜 어른 같은 다소 이상한 표현들은 아마도 이런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에 성년이 된 많은 사람들 중에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도록 이미 자라난 사람들은 아주 드물 것이다. 능력 밖에 있는 명품을 사고, 빚을 내어서 비싼 차를 사는 소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기대하는 자기 삶을 구현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일 테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누추한 사람들의 환경에 접하지 않고 싶어 한다. 배변을 가리지 못하는 조부모들, 온수가 나오지 않는 이국의 숙소, 각다귀와 바퀴벌레가 가득한 계곡 공용 화장실의 풍경 같은 것들은 종종 깔끔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똥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똥은 무엇인가? 더럽고 추악하고 지극히 자연적인 배설물은 어느 한 명의 인간이라도 초월적인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각자의 결핍과 부끄러움을 갖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누추하고 부끄러운 현실과 사지를 비비며 견뎌낼 때, 고등학교 내신이나 친구들 간의 말다툼보다 더 어렵고 고매한 아픔을 서로의 삶에서 종종 발견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비루해지면서, 동시에 숭고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