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유학 생존기 8
남성에게 머리를 기를 좋은 기회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특히나 몇 개월을 아무도 안 만나도 되는 상태로 집에만 있을 수 있는 기회, 기회라고 부르긴 뭐한 상황은 더더욱 드물다. 그래서 머리를 기르기로 했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 두 번째 시도인데,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나름 성공적인 것 같다. 첫 번째 시도는 무작정 미용실을 안 가고 몇 달을 버텼다. 머리를 안 감은 상태, 특히 아침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하루에 구걸만 해서 억대 단위를 번다는 아랍 거지들이 생각났다. 물론 돈을 못 벌고 닮기만 했으니까, 말 그대로 거지만도 못한 몰골이었다.
그러면 왜 머리를 기르는가? 사실 스타일링이라던가 패션 같은 고상한 이유들과는 거리가 먼 까닭이 하나 있다. 이제 곧 미국으로 갈 것이고, 그곳은 커트 비용이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다. 보통 남자 머리 한 번 깎는 데 십만 원 가까이 든다. 안 그래도 생활비가 빠듯할 것 같은 곳에서 머리카락 같은 단백질 섬유 덩어리를 관리하자고 정기적인 지출을 추가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돈 문제뿐만은 아니다. 평생 서양인들만 깎아주던 미용사들이 한국 스타일 머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네들은 머리나 패션 같은 꾸미기에 대체로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고, 실제로 화상강의에서 마주친 대부분의 학생들이 스포츠컷을 하고 있었다. 좋다. 스포츠컷. 효율적이고 깔끔하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머리는 아니다. 악성 직모에게 스포츠컷은 수평으로 뻗는 악몽 같은 앞머리와 감당 불가능한 옆머리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 그런 머리를 해 왔었고, 그래서 내 기억 속에서 그맘때의 사진들은 내 정신적 건강을 위해 잊혀지고 없다.
그러다가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서 강연 요청이 왔다. 강연 몇 주 전부터 머리를 다듬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일주일을 남겨두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결국 4개월가량 길렀던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버렸다. 그 후로 공적인 자리에 아무런 꾸밈없이 나오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건 엄청난 배짱이 필요한 일이고,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망가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심리도 있지만, 창작을 하는 사람들,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과 작가 자신의 삶을 자주 비교당하고는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등학교 교육이 잘못되었다던지 학생들이 제대로 자라지 않고 있다던지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감히 써본 주제들을 책에 아득바득 욱여넣은 작가가 중학교 강의에 산발이 된 머리로 등장한다는 것은 조금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정수리 부분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 게 또 네 달쯤 됐다. 그러니까 이번 시도도 네 달째 진행 중인 것이고, 저번과는 다르게 투블럭 컷으로 정리를 하면서 기르고 있다. 원래 숱이 많은 편인데, 투블럭 라인을 높게 잡고 머리 대부분을 깎아버리니 머리는 길어 보이면서도 산발이 되지는 않는, 정상적인 모량의 사람들이 머리를 길렀을 때처럼 보이게 되었다. 가르마 펌을 하면 옆머리가 없어서 구레나룻이 뻗치지도 않고, 묶은 상태에서도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다. 나름 만족스럽다. 관리가 어려운 편도 아니고, 미국에서도 설명이 쉬운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투블럭 라인 밑을 밀고 윗머리는 펌을 해달라고 하면 된다. 머리 기르기에 도전하기 전에 하던, 투블럭 상고머리에 볼륨매직펌은 당연히 그곳에서 먹힐 리가 없다.
사실 머리를 기르는 일은 무언가 꾸준히 해야 하는 다른 일들보다 버티고 견디는 일에 더 가깝다. 거지존에 들어선 내 몰골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감당해야 하고,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짜야하는 샴푸, 훨씬 오래 걸리는 드라이 시간 같은, 꾸준히 감내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좋은 점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곧 유학을 가야 하기 때문에 길러보기로 마음먹었을 뿐이고, 이렇게 오래, 남에게 안 좋은 꼴을 덜 내보이며 머리를 기를 수 있는 시간이 인생에 또 언제 찾아오겠냐는 생각에서 기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