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며 위로받는다는 것에 관하여
지난 6월 브런치 작가가 된 이후 발행했던 16개의 글을 모두 지웠다.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 클릭 몇 번이 고작이었으니까. 무성의하게 쓴 글은 아니었다. 기억 속을 부유하고 있는 날들을 생생하게 녹여내려고 애썼던 여행기였다. 한 줄, 한 줄 적어내려가며 누군가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정도의 괜찮은 글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느꼈던 흥분과 즐거움, 설렘과 행복이 읽는 이에게도 닿을 수 있도록 사진을 고르고 글을 썼다.
'그건 과연 나를 위한 글이었을까.'
삐딱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글은 그냥 글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글에 솔직한 사람일 것이다. 반면에 나는... 나는 글에 그다지 솔직하지 못했다. 내가 써내려 갔던 여행기가 거짓 투성이의 허구라는 뜻은 아니지만.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릴 때부터, 글을 쓰기 전에 늘 솎아내는 버릇이 있었다. 내 감정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자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일 때 더욱 그랬다. 아무도 읽지 않을 플래너나 다이어리에 조차도 적어내지 못했다. 누가 읽을까 무섭기도 했거니와 굳이 아팠던 찰나의 감정을 글을 통해 붙잡고 싶지 않아서.
나의 일기는 항상 '오늘은 ~을 했다.'로 희망차게 시작하여 '다음에도 또 해야겠다.', '재미있었다.'등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마무리되었다. 즐거움으로 가득 찬 날도 있었지만 아닌 날도 많았다. 사소한 즐거움으로 커다란 우울함을 가려내는 것은 습관 같은 일이 되었다. 글로써 위로받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나에게 글은 그런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즐거움의 파편조차 없는 날은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럴 땐 그냥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라도 내 마음을 숨기고 싶었다. 내가 그린 그림은 타인의 관심을 끌기엔 부족한 솜씨였기에 누구도 나에게 왜 이런 걸 그리느냐 묻지 않았다. 설령 물어보더라도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림을 좋아했다. 표현을 하면서도, 표현하지 않는 방법이었으니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글'에 대한 생각을 점차 바꿔나가게 되었다. 아니, 바꿔나가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이 더 맞을 것 같다.
오래도록 동경해온 영화는, 끝끝내 나를 관객의 위치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노라는 어쩌면 험난하고 비현실적인 길로 이끌었다. 처음엔 한 단편영화의 스태프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도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여전히 '(소설이나 시나리오 같은 만들어진) 이야기는 나를 숨겨준다'는 얄팍한 생각 또한 있었다.
이내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일기와 소설이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소설은 자서전과 다를 바 없다는 말처럼, 나의 시나리오에는 어떤 식으로든 나의 경험이 짙게 남았으며 나의 생각이 강하게 투영되었다. 나를 지우는 글을 쓰려 애써봤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가상의 캐릭터라는 연약한 방패로 나의 결핍과 욕망을 표면적으로라도 부정할 수 있었다. 지독한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다. 그게 나였다.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세상에 꺼내놓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 연약한 방패 덕분에 용기 낼 수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 수필이나 일기를 보여줘야 했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갔을 것이다. 아니, 솔직하지 못한 글을 써내려 갔을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나와 비슷한 꿈을 꾸며 같이 영화를 만드는 친구들! 그들은 내가 써 내려간 글과 내가 가진 생각을 나보다도 더 소중히 다루어 주었다.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자꾸만 글을 쓰고 싶어 졌고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졌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쓴 글들은 쌓여갔고, 어느 순간 (작가의 숙명처럼)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은 도대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쓰는 소설과 시나리오에 나의 생각이 투영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해졌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나'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껍데기뿐인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브런치에 발행하던 짧은 여행기는 오직 즐거웠던 감정만을, 마치 그것만이 전부였던 것처럼 적어 내려간 것 같다. 퀘퀘 묵은 추억을 돌이켜보겠다는 목적을 내세우며 철저하게 나를 위한 여행기처럼 나를 속였지만 내가 써 내려갔던 건 남들에게 꺼내 보일 수 있는 솎아진 편린이다. 그래서 나의 추억팔이는 이쯤에서 멈춰보려 한다.
깊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관계는 더욱 무르익는다.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글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글에게도 마음을 더 열어줘야겠다. 글에게 진솔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글도 나를 위로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