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상사 이야기
디자인하는 모두가 이렇게 생각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디자인은 개인 취향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별로인 것도 다른 이가 보이엔 세젤예일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클라이언트의 취향이란 가늠하기 어려워서 모든 디자이너에게 같은 스타일의 디자인을 하라고 했다간 클라이언트의 취향을 맞추기 더욱 힘들 것이다.
하지만 팀장 D는 스타일의 ‘철옹성’ 같은 사람이었다. 팀장 D는 대표 C와 마찬가지로 작은 디자인 회사에 다닐 때 만났던 상사였다. 그의 주 종목은 편집디자인으로 나의 짧은 경험상 편집디자인을 잘 해내기 위해선 꼼꼼함과 섬세함이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는 딱 그런 성격이었다. 일정 관리도 아주 꼼꼼했고, 직원들의 작업물 피드백을 줄 때도 상세하게 해 주었다. 일 처리가 굉장히 능수능란했고 초보 디자이너였던 내게 그는 배울 점이 많은 상사였지만 철옹성 같은 디자인 스타일이 문제였다.
어쨌거나 디자이너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서 같은 내용을 갖고 작업하라 해도 다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팀장 D는 직원들에게 그것을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선배 디자이너는 실험적인 레이아웃을 자주 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의 스타일이 꽤 신선하다고 생각했는데, 팀장 D에겐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배 디자이너가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팀장 D는 논리 정연하게 왜 이 시안을 고쳐야 하는지 말했고, 문제는 시안의 모든 부분이 본인이 말 한 대로 수정이 될 때까지 계속 같은 피드백을 주었다. 결국 결과물에는 선배 디자이너의 스타일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내게도 있었다. 그때 나는 웹사이트 홍보용 카탈로그를 작업 중이었는데 미팅 때 들은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토대로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일러스트로 작업하고 있었다. 사실 일러스트 분위기를 정할 때도 약간 의견 차가 있었지만 팀장 D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서 그의 말을 따랐다. 다행히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문제는 캐릭터를 만들 때였다.
클라이언트는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맞은 마스코트 역할 캐릭터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한 마스코트 캐릭터를 만들어 시안에 적용했는데, 팀장 D의 마음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팀장 D : 다른 일러스트는 이제 괜찮은데, 캐릭터가 너무 귀엽지 않아요?
나 : 미팅 때 그쪽에서 아기자기하고 마스코트 같은 캐릭터를 원한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작업해 봤어요.
팀장 D : 그런데 이 캐릭터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너무 애기 같아요. 형태가 너무 캐릭터 같아서 사람처럼 바꾸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나 : 애기 같진 않은데요.
팀장 D : 웹사이트 이용자가 보통 20, 30대니까 거기 맞춰서 사람처럼 바꾸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나 : 그렇게 되면 마스코트 캐릭터 같은 분위기는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일러스트에 묻혀서.
팀장 D : 별로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요.
나 : 그럼 일단 지금 시안으로 한번 보내보고 수정이 오면 말씀하신 대로 작업해서 보내보면 안 될까요?
팀장 D: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대화가 이어졌다. 물론, 팀장 D가 훨씬 경력도 많으니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간 선배들의 작업에서 그리고 내 작업에서 보였던 팀장 D의 고집이 그날따라 너무 싫었다. 그리고 내가 무조건 이대로 하겠단 것도 아니고 일단 한번 보내나 보자고 했는데도 거절이라니. 짜증 났다.
나 : 팀장님 너무 팀장님 스타일대로만 수정하라 하시는 것 아니에요?
나는 결국 이렇게 내뱉었다. 지금이라면 덜컥 그런 말을 못 했겠지만, 그때 난 멋모르지만 욕심 많은 하룻강아지였다.
팀장 D : 제가요?
나 : 네, 제가 작업한 대로 일단 보내나 보고 아니라 하면 수정하자고 했는데도 무조건 팀장님이 말한 대로 수정하라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팀장 D : 저는 작업물 퀄리티를 올리려고 그렇게 말 한 건데, 그럼 지야 씨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피드백이 다 기분 나빴어요?
나 : 아니요. 저도 팀장님 말 듣고 납득 가는 부분은 다 반영했는데, 이번엔 제가 말한 대로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계속 아니라고 하시니까 하는 말이에요.
팀장 D : 그럼 시안을 각각 만들까요?
나 : 네? 그럼 팀장님은 팀장님이 새로 시안 만드신다는 거예요?
팀장 D : 지야 씨가 만든 소스로 제가 시안 하나 만들고 지야 씨는 지야 씨 생각대로 만들어서 둘 다 보내죠.
‘마! 자신 있나!’라고 소리칠 만큼 자신이 있었으면 ‘그렇게 합시다.’ 했을 텐데, 솔직히 팀장 D의 시안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라 레이아웃부터 폰트 사용 등등 다른 면에서 분명 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만든 소스를 그에게 전달해주는 것 자체가 싫었다. 결국 지루한 말다툼의 끝은 내가 꼬리를 내리는 거로 끝이 났다.
나 : ···알겠습니다. 수정해서 올게요.
결국 캐릭터는 팀장 D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졌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클라이언트는 어느 정도 만족했다. 그 프로젝트 이후 나는 팀장 D와 함께 작업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팀장 D의 철옹성 같은 취향에 시달린 신입직원 F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어깨를 토닥일 뿐이었다.
대화 내용을 보고 느꼈을 수도 있지만 사실 팀장 D의 피드백은 고집과 조언 그 언저리에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아까운 부분도 많다. 몇 번 그런 일을 겪으며 그에게 반감이 생긴 탓에 새겨 두면 좋을 그의 조언도 조금 흘려들은 것 같다. 감정을 자제하면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은 잘 챙겨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