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좋은 환경이 갖추어진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쓰인 말이라 한다.
나 역시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은 아니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서울에 더 많은 회사가 있으므로 기회가 더 많을 거란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대학 졸업하고 출판사를 구하면서도 수도권으로 알아봤고 디자인 쪽으로 전향한 후에는 서울 쪽 일자리만 알아봤다.
그러한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디자이너로서 첫 직장을 서울, 그것도 중구, 그것도 종로 한가운데 청계천이 흐르는 곳에 구하게 되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처음 그곳에 갔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이었다. KTX로 서울역에 막 도착한 나는 시간 맞춰 회사 근처 종각역에 내렸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보이는 높은 빌딩 숲은 잔뜩 들뜬 내 마음처럼 위로 위로 솟아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성공했다.’는 인상을 주는 서울의 분위기는 빌딩 숲 사이로 풍기는 바람 냄새마저 ‘아, 여기가 진짜 서울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처음 내가 서울에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꽤 염려했다. 물론 대학교도 부산에서 다니느라 기숙사에서 살았고, 경기도에 있는 출판사에 취직했을 때도 회사 기숙사에서 살았지만 부모님께 서울은 그곳보다 더 염려되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혼자 지내야 한다고 하니 더욱 걱정했던 듯하다. 하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디자이너로 일하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마침내 면접 봤던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자 부모님도 그렇게 하라, 잘 됐다며 응원해주었다.
무엇도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부모님이 서울에 원룸 하나 얻어줄 만큼의 여유는 없었지만 ‘노 플라블럼’이었다. 내겐 미리 봐 두었던 고시원이라는 새로운 주거형태가 있었다. 마침 면접 합격 통보받기 전 참가했던 공모전에서 상을 타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나는 그때 탄 상금 100만 원을 밑천으로 상경했다. 흐름이 좋았다. 모든 게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출퇴근 경비를 아끼기 위해 회사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월세 32만 원짜리 고시원에 서울살이 첫 둥지를 틀었다. 고시원은 양팔을 벌리면 닿을 만큼 좁았지만, 불만은 없었다. 어쨌든 내겐 첫 서울살이를 함께할 소중한 보금자리였고, 돈을 조금 더 써서 안에 아주 작은 욕실이 딸린 방을 얻었기에 나름 구색도 갖춰 있고 좋아 보였다. 지낼 만하느냐는 엄마의 염려 섞인 전화에도 늘 이 정도면 고시원 치고 넓은 거라며, 지내기에 무리 없다고 대답했었다.
그렇게 잔뜩 부푼 기대와 그 기대로 마비된 머리와 마음을 안고 본격적인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