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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May 24. 2020

벌써 일 년

산남일기 #28

장미에 꽃망울이 우두두 돋아 나더니 비 한 번 내리니 도미노 번지듯 꽃이 피어났다. 장미는 역시 꽃의 여왕이다. 빨간 장미 - 흔하디 흔한 색인데도 감동을 주는 힘이 있다. 아마 남의 집 담장에 피었거나 어느 아파트 화단에 피어있었더라면 감동은커녕 장미가 그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게다. 우리 집 장미니까 감동이다.


파주, 산남동으로 이사 온 지 일 년이 됐다. 여의도 아파트를 떠나 처음 자유로를 달릴 때, 나는 살짝 겁이 났었다. 낯선 시골살이가 과연, 적응이 될 것인지... 게다가 (당시에는) 판교로 출퇴근해야 하는 가혹한 미션도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이었다. 처음 텅 빈 집에 도착해서 이삿집 차를 기다리는 동안, 낯설어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당 데크에 앉아 생수를 들이키며 심호흡을 했다.


계절의 여왕, 5월 - 산 중턱 마을은 따사롭고 시원하고 푸르고 싱그럽고 편안했다. 그 덕분에 지난 일 년 무사히 적응할 수 있었다. 사실 '무사히'라는 건 너무 조심스러운 표현이다. 상상 이상으로 이 집과 마을에 빠졌다.


여의도 생활을 정리하고 파주 집으로 이사해야겠다고 결심할 즈음, 우리 부부는 인생의 중간결산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삶이 어찌 결산이 되는 성질이겠나만은, 우리가 언제까지 일할 수 있고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수입을 예상할 수 있는지, 그와 연관해서 어느 정도의 지출이 예상되는지... 아주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의미의 결산이었다. 숫자는 때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수입이 줄 것을 예상하는 순간, 우리 삶이 절정을 지나 내리막길로 이미 접어들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니, 냉정하게 '결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삶의 변화를 감지하고 인정하고도 마음의 동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원래 은퇴하고 이사하려던 계획을 조금 앞당겨 일찍 시골로 가자는 결정이었고, 복작거리는 도시 생활에 대한 피로감도 쌓여 있었던 것 같다.  


일 년 동안, 시골에 사면서 얻은 것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가장 큰 것은 자연과 좀 더 친해졌다는 것. 도시에서 자연은 '일기예보'처럼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해 수집해야 하는 정보이거나, 주말에 잠시 만나는 정도로 거리감이 있었다면, 여긴 그냥 자연에 기대서 사는 느낌이다. 땅도 바람도 비도 모두 자연의 힘으로 움직이는 그 옆에 한 자리 내어 인간도 그 일부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언제부턴가 '집'의 연관 키워드는 '집 값', '평수'처럼 수치로 표현되는 그것이었는데 이제 '집'이 일상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환경으로 인식되었다는 점.


지난 일 년은 워밍 업이었다. 이제 정말, 시골사람이 되어서 이 곳의 생활을 즐기고 음미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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