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일기 #30
파주로 이사 온 이후 '저녁' 시간은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자리이자,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 대한 토로의 장이자, 각자의 고단한 일상의 멍울을 풀어내는 하소연의 자리이기도 했다.
몇 주전, 남편이 저녁을 먹으며 나와 논의할 '좀 심각한 안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사에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기자가 갖춰야 하는 문제의식과 고단한 생활에 대한 인내, 좀 과하면 부담스러운 사명의식까지 가지고 삼십 년 넘게 기자'질'을 해온 남편이 정년을 얼마 안 남기고 퇴직을 하겠다는 건 좀 의외였다.
첫날의 의논은, 3:7 정도로 스테이로 결론 났다. 그래도 이만한 직장 없지 하는 되뇜에, 오죽 재미가 없으면 희망퇴직 공고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을까 하는, 하는 일의 재미없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희망퇴직 공고를 2주 넘게 주는 바람에 우리는 저녁 시간마다 심각한 안건을 반복적으로 얘기하게 됐는데 (술 엄청 마심) 조금씩 벗어나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한 발 앞서 정규직을 벗어난 선 후배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회사 담장 밖은 춥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뭔가 확실한 계획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따뜻한 자리보전하는 것이 최고라는 조언이 많았다고 했다. 매우 현실적인,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
일주일 사이 서서히 줄다리기 밀리듯 '스테이'는 밀려나고 있었다. 탈출 쪽에 힘이 쏠렸다.
삼십 대 초반부터 '정규직' 박차고 나와 이런 일 저런 일 다해 본 나로서는 '따뜻한 자리 지키라'는 조언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변화를 지켜보자니 재미없는 일 꾸역꾸역 하는 것보다는 그만두고 마음 편한 삶을 찾는 것이 나아 보였다. 다행히 아이들도 다 컸고 파주로 이사하면서 한차례 부채를 정리하고 씀씀이를 줄이는 정돈을 한 탓에 가계 수입이 줄어도 적응할 수 있겠다 싶었다.
50대, 은퇴를 앞둔 세대. 활발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다는 두려움을 어깨에 지고 이유 없이 주눅 들어 사는 시기다. 슬슬 몸이 늙는 것도 확연하게 느껴지고 자신감은 더욱 바닥을 친다. 비록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회사 명함 하나쯤 들어 있어야 싸늘한 시기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든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뭔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MZ 세대를 위한 '살아가는 법'에 대한 책과 강의는 넘쳐나는데 은퇴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다들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퇴직금으로 치킨집을 내야 할지, 편의점을 해야 할지, 임대료를 받으며 살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다 지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 늦기 전에 새 길을 찾으려 용기를 낸 남편의 결정에 박수 쳐주고 싶다. 퇴직을 결정하면서, '생계형 취업'은 하지 말라고 쿨하게 말해줬다. 뭘 하더라도 재미있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기를 바랄 뿐이다. 오십 대의 도전은 '정형화된 공식' 말고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기반으로 서로 다른 색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생의 피보팅을 시작한 남편 덕분에 우리 가족도 함께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 것이 설렌다.
덤으로, 이젠 눈치 안 보고 '미디어 비평'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도전하는 오십 대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