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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Dec 17. 2022

유후인, 진정한 휴식처

2022 결혼 기념 여행

올 가을은 몹시 힘들었다. 9월 말 보스턴 다녀온 후 바로 10월 중순에 싱가포르 출장까지 강행했더니 그 이후에는 몸이 견디지 못하고 좀 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래, 나이를 잊고 너무 몸을 혹사했지라고 생각하며 여행 계획을 세웠다. 마침 12월 초 우리의 결혼 32주년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으니 여행의 명분은 충분했다.


여행의 목적은 무엇보다 '쉬는 것'이었기에 여행지를 정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일본 온천을 떠올렸고, 유명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유후인이면 좋을 것 같았다.


11월은 일하는 틈틈이 여행 계획을 짜며 그 힘으로 견뎠다. 료칸 예약은 일본에 있는 선배에게 부탁했고 구글 번역기 돌려가며 기차, 버스 등등을 예약하고 가보고 싶은 식당도 몇 곳 찾아 두었다.



드. 디. 어! 12월 9일, 그날이 왔다. 유후인까지는  '유후인노모리'라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 예쁘고 아담한 기차였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한 것이 12시 10분 정도. 입국 수속을 마치고, 후쿠오카 국제여객터미널에서 국내선 터미널로, 그곳에서 하카타 역으로, 하카타역에서 기차표 발권을 받아 플랫폼에 도착하기까지 단계 단계 미션을 깨듯이 움직였다.


드디어 기차를 타고 자리를 잡으니 여행의 설렘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다. 기차 바퀴가 철로를 차내며 덜컹덜컹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어 냈다. 후쿠오카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로 들어서자 시골 풍경이 펼쳐졌는데 우리나라와 매우 비슷한 느낌이었다.


2시간을 달려 도착한 유후인. 역 앞에 내리니 길 따라 오밀조밀 상점들이 들어서 있고 저 멀리 유후다케라는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는 길을 따라 숙소에 도착했다.


유후인에서 첫날은 유후인의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유노츠보 거리 초입에 있는 료칸에 머물렀다. 료칸은 호텔식 구조였으나 내부는 다다미를 깔아 일본의 분위기를 냈다. 방이 넓고, 개별 온천에, 각종 시설이 깔끔하게 잘 갖춰져 있었다. 짐 풀고 온천 한 번 하고 유카타 걸쳐 입고 료칸의 가이세키 정식으로 저녁 먹고, 식사 후 온천 한 번 더하고... 생각했던 그대로 시간을 보냈는데도 하나하나가 즐겁고 편안했다. 내가 원했던 휴식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기념일'을 자축하기 위해 술 집을 찾아 나섰다. Bar Stir. 촘촘하게 앉으면 8명 정도가 들어감직한 바 테이블이 다인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첫 손님. 전형적인 Bar 진열장에 빼곡히 종류별로, 연도별로, 잘 정돈된 술 병이 이곳 마스터의 격조 있는 외모와 잘 어울렸다. 무엇으로 보나 완벽해서 마치 잘 연출된 세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은 야마자키 위스키를, 나는 레드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 한 잔을 따르는 모습을 보아도 마스터의 전문성과 연륜이 느껴졌다. 어색한 세트에 술의 훈기가 돌고, 기념일에 들뜬 목소리가 더해져 공간에 온기가 돌 때쯤 스님과 친구 일행이 들어왔다. 후쿠오카현에서 청수사라는 절을 운영하고 계시는 스님이 청수사의 가을 단풍을 자랑했다. Bar Stir의 단골로 보이는 스님 일행으로부터 이곳의 마스터가 도쿄 제국호텔에서 오랫동안 바텐더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후로도 여자 손님이 한 명 더 왔고, 우리는 술을 한 잔씩 더했고, 일본어와 한글과 영어가 뒤죽박죽 섞이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눈빛과 웃음이 번졌다. 남편은 다음번 후쿠오카 여행에는 반드시 청수사를 가겠다고 진심이지만 지켜지기는 어려운 약속을 했다.


Bar에서의 유쾌함이 마치 현실보다는 꿈을 꾼 것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유후인에서의 경험을 미리 꼼꼼하게 계획했지만 Bar Stir는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 같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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