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라든 장기간 동안 머무르기 위해서는 비자가 필요하다. 나는 학생 비자로 신청했고, 이를 위해 대학교의 어학당에 등록하였다. 대학교라.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다시 학생 신분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요즘 타입슬립물이 유행인데 나도 그런 걸까. 자고 일어나니 대학생이 되었다, 서른이 넘었지만 대학생입니다, 아줌마이지만 학생할인을 적용해 주세요, 등등.
내가 다니게 될 학교는 FAAP라고 상파울루에서는 패션 쪽으로 잘 알려진 대학교였다. 조금 더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학비가 높아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곳으로 유명했다. 등교 첫날, 캠퍼스에서 고야드와 발렌시아가 가방 안에 맥북을 넣고 다니는 학생들을 보며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소박했다. 그렇다고 주눅 들지 않았다. 되려 샤넬 가방을 바닥에 두는 학생을 보며 꼭 친해져야지,라고 다짐했다. 고위권 자제? 오히려 좋아!
오랜만에 캠퍼스를 돌아다니니 기분이 묘했다. 학교는 크지 않지만 휴식 공간, 운동장, 도서관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백팩을 메고 학교 기념품 판매점에 들어갔다. 학교 로고가 이따만큼 크게 박힌 에코백, 반팔티, 아우터, 학용품 등 각종 굿즈가 가득했다. 한 학기만 다니는 학교이지만 벌써부터 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깔나는 대학 생활을 보내야지,라고 다짐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내가 왜 대학원에 가지 않았는지 새삼 그 이유가 상기되었다. 공부가 싫어서. 사무실 대신 교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거늘, 공부는 언제든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배울 게 없었다. 이 무슨 발칙한 소리인가, 싶지만 한국에서 10주 동안 포르투갈어를, 그것도 문법 위주로 야무지게 배워와서 수업 시간에 다루는 내용은 쉬워도 너무 쉬웠다. 그렇다고 수업을 대충 듣기에는 듣기와 말하기가 막혔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고질병인가. 읽고 쓰기는 누구보다 잘하지만 듣기와 말하기가 안 되는. 아무튼 얼마 안 남은 집중력을 모아 모아 수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내가 가장 좋아하던 수업이 있었는데 바로 문화 수업이었다.
일주일 중 하루는 문화 수업으로 브라질의 문화를 배우는 날이었다. 브라질 전통 무술인 카포에이라를 배우기도 했고 전통주인 까샤사를 이용한 칵테일 수업도 있었다. 말만 수업이지 사실상 노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 더 즐거운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이 시간에는 수업 진행을 도와주기 위해 많은 브라질 학생들도 참석했다. 보통 브라질 학생들은 엄청 활발하고 외향적이어서 친해지기 쉬웠다. 서로의 나이를 신경 쓰지 않는 브라질 특성상 19살, 20살짜리 학생들과도 손쉽게 친구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가거나 노래방을 가고, 그들의 연애사를 들으며 도파민을 충전하곤 했다. 이렇게 수업에서 지쳐도 문화 수업에서 즐거운 기운을 충전하며 충실한 학교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그렇게 찌든 회사원에서 시든 대학생이 되어 브라질 생활을 잘 이어나갔다. 벌써 브라질에 오고 삼 주가 흘렀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