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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구 Jul 06. 2015

별 볼일 없는 여행의 시작

직장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른 대륙으로 도망가기도 한다


2010년 3월,


사회생활 애송이 레벨의 나.


프로젝트라는 프로젝트는 다 따라다녀야 했고

늘 야근과 주말 출근에 시달려야 했다.

쪼렙은 힘이 없으니 열심히 배우고 또 일하고 일했다.

그때의 나는 꽤 성실했다.


그런 생활도 2년간 지속되니 나도 모르게 많이 지쳤다.


그래도 쪼렙은 미미하게 렙업을 했고

바쁘기만 하던 회사생활에도

약간의 여유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유라는 존재와 함께 내 머릿속은 잡다한 생각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당시 내 주변은 유럽여행 붐이 일었다.

나는 비행기라고는 김포-제주 구간 고작 몇 번 타 본 것이 전부였는데.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는 유럽여행을 다녀왔다고 했고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샘솟았다.



여유란 무서운 존재다.





며칠 뒤, 난 나를 유독 아껴주고 배려해주던 팀장님께 퇴사 의사를 전달했다.

자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퇴사를 시켜준다기보단 여행을 보내 주시는 듯했다.

실제로 귀국 날 체크인을 했더니 내게 연락을 하셨다.

"돈 쓰고 왔으니 돈 벌어야지?"

좋은 분이시다.



애송이는 인수 인계할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 사이트에서 왕복 항공권을 찾았뒤졌다.

방대한 양의 인터넷 정보는 귀찮아서 읽기를 패스하고

가장 많이 보이는 런던 in 파리 out이라는 여정을 선택했다.

유럽 대륙을 한 바퀴 돌기 무난한 코스라는 의견이 다수였고

그냥 런던과 파리라는 도시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난 사실 그때까지도 유럽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잘 몰랐었다...


용기와 어리석음은 한 끗 차이.




얽매이는 것은 질색하는 성격 + 유럽 정복 욕구에

일단 리턴 티켓은 오픈시켰다.

굉장히 흥미로운 희귀 아이템(=오픈 티켓)이라 끌렸고

돈을 펑펑 쓰고 최대한 유럽에서 버텨보자는 속셈이었다.  

애송이에게 모아둔 돈은 여행하기에 꽤 많은 것(?) 같이 느껴졌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의 과소비.

숙박은 일단 런던에 도착하는 날부터 2박 예약을 했다.


항공권을 예약하고 퇴사 및 출국을 앞두니 바빠졌다.

왜. 모르겠다. 암튼 바빴다.

야근도 했고 술도 자주 마셨다.



여전히 내가 유럽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실감나지 않았다.




이렇게 예약부터 출국일까지 2주 걸렸고

샘*나이트에 가서 24인치 캐리어도 구매했다.






하늘을 날아서 다른 대륙으로 이동한다

출국.


그동안 타 본 비행기와는 다르게 압도적으로 큰 빅사이즈 비행기!

입장을 하니 담요도 주고 칫솔 치약도 주고 슬리퍼도 있고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누군가와 영어로 인사를 나눈 것도 믿기지 않았다.

기초영어였지만.


하늘에서 먹고 마시는 밥과 술은 좋았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으면 다른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창문 덮개를 덮고 날아다니니 어쩌면 대륙간 이동은 행성간 or 시간 이동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좌석 앞에 놓인 모니터도 신기했다.

최신 영화부터 오래된 영화, 각종 장르의 음악, 다양한 게임까지.

12시간이 넘는 비행은 굉장히 즐거웠다.

영화를 보다 졸고 있으면

불을 켜고 밥을 주는 시스템도 만족스러웠고

출출해지면 셀프로 가져다 먹을 수 있는 라면과 초콜릿 등의 간식도 마음에 쏙 들었다.



먹을 것 많은 것 = 좋은 것






어느새 비행기는 착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리기 싫었다. 비행 좋은데!!!


사실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악명 높은 히드로 공항의 입국심사.





누구보다 빠르게 바보 멍충이가 되는 방법, 영어로 말하기


흑인 여성 앞에 내가 서 있었다.

내 자신을 내려놓고 내가 아는 영단어를 총동원했다.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도 모르는 그게 말이 되긴 하나 싶은

나의 첫 외국 입국심사는 끝이 나긴 했다.


부끄러움에 후다닥 짐을 찾아 입국장을 벗어났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자신감을 잃은 탓인지

입국장을 나오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앞에 보이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 눈물을 쏟았다.


나는 여길 왜 온 걸까?

그냥 일하고 있는 것이 더 낫겠어.

아는 사람도 없어...

엄마 보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하나도 없어.

도대체 여기를 왜 온 거야..

영어도 못하면서 어떻게 지낼라고?

근데 뭔 공항이 우리나라보다 안 좋아..

문도 좁구  


음..

어어?


외국인 커플이 키스를 한다

오.. 이것은 서양 문화인가요?  

오호... 어? 그러고 보니 러브 액츄얼리 영화의 한 장면 같아!


??



아 맞네! 그거 영국 영화니까 여기서 찍었나 보다

우왕 그럼 나 영화 촬영 장소에 온건가?

검색해봐야 하는데 인터넷이... 될 리가 없지



슬슬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마 이 때 나는 좀 이상한 여자 같았을 거다.

날 보고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냥 없던 일로.







내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별 볼일 없는 이야기가 이렇게 길다.

THIS WAY for the next level.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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