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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취객 May 17. 2020

시린 밤일수록 별이 더 밝다

외롭고 힘든 밤이 조금은 괜찮아지는 주문

    내 인생의 암흑기야 지금까지도 많았지만은 또 아직 미처 오지 못한 것까지 세면 얼마나 수도 없이 많을 예정일 런지. 그래도 방랑 중에 어느 순간이 제일 힘들었거나 외로웠는지 되짚어 보면, 뉴질랜드에 있을 때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지 불과 몇 개월 되지 않은 채라 이제 막 실감을 하고 있었을 때고, 안정적이던 오키나와보단 아직 적응도 되지 않은 남반구의 하루하루가 사무치도록 외롭게 지나갔다.


    내가 근무하던 퀸즈타운은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해 있다. ‘여행의 미치다’등 우리나라 여행 인플루언서들이 한 달 살기를 하며 유명해지기 전 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쉽게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 남미 등 세계의 배낭 여행객과 방랑객들에겐 액티비티 필수 코스로 북적 거리는 관광지다. 세계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번지점프, 스카이다이빙, 패러글라이딩, 계곡 스피드보트 등 다양한 액티비티와 대자연만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멋진 장소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뉴질랜드 자체도 친구의 추천으로 지원한 워킹홀리데이가 덜컥 합격해 온 곳이고, 퀸즈타운도 이전 상사의 추천으로 일자리를 바로 구하게 되어 도착했다. 하루하루 밥이나 해 먹으며 그냥 흘려보냈다. 집 앞에 몇 발자국만 가도 보이는 와카티푸 호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푸른색을 빛내고 있었다.

내 맘도 모르고, 너는 왜 이리 푸른지


    일하는 날이면 회사에서 사람도 보고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지만, 문제는 쉬는 날이나 일 끝나고 시간이 남는 밤이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 집 앞 마트에서 맥주를 잔뜩 사서 혼자 방에서 침대에 누워 맥주를 마셨다. 항상 마시던 것은 스파이츠 골드 메달 에일(Speight's Gold Medal Ale). 남섬에서는 누구나 즐겨 마시는 아니 가장 자주 보이는 그저 그런 쉽게 마실 수 있는 라거 맥주였다. 로고는 꽤나 이쁘게 ‘남섬의 자존심(pride of the south)라고 적어 놓으니까 눈에 잘 띈다. 가장 흔해 빠진 맥주가 마음에 들어 매일 집술 혼술을 취해 쓰러질 때까지 마셨다. 뉴질랜드에서는 술을 밤새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미리 한두 박스 구매해두면 한 박스가 이틀이면 사라지곤 했다.

매일 밤 혼자 반 박스(10병가량)를 마시면 필름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렇게 매일 취한 채로 뉴질랜드 생활을 하다가, 어느 추운 겨울밤 일을 마치고 집에 터벅터벅 걸어가던 길이었다. 바람이 너무 시려 손으로 꽁꽁 언 귀를 녹이며 하늘을 올려 보다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별이 쏟아질 것 같다는 표현을 많이 들었지만, 정말 너무 많은 별들을 바라보자니 되려 내가 별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너무도 추운데, 너무도 아름다웠다. 문득 아버지가 생각나서 한참을 울다가 집에 들어갔다. 추위는 금세 잊어버렸다.


    시리도록 추운 새벽에 밤하늘의 별이 더 잘 보인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다. 과학적으로는 전혀 안 맞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있던 곳이 뉴질랜드 남섬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 나는 때때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거나 창가에 앉아 비 내리는 소리를 하염없이 듣곤 한다. 그러면 많은 게 괜찮아진다.


    시린 밤의 별이 더 밝다. 너무 추워 힘든 밤이면 별이 밝을 것이라 괜스레 기대해본다. 힘들고 외로울 때면 내가 못 보고 지나친 별빛들이 어딘가 있을 거야 주문을 왼다.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러는 거야. 이런 밤엔 맥주는 한 병이면 족하다.

은하수가 선명히 보이는 뉴질랜드의 밤은 사무치게 외롭곤 했다.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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