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여행은 한잔의 술에서 시작된다.
프라하 공항에 내리면, 한국인의 아니 한국 관광객의 위상을 알게 된다. 수많은 나라의 공항에 내려 안내 표지판을 바라볼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그 나라의 언어, 그 뒤에 영어 또 그 뒤에 중국어. 아시아 권에서는 일본어가, 유럽권에선 스페인어 혹은 프랑스어가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동유럽 국가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공항에서는, 자랑스러운 한글이 눈에 확 띈다. 프라하를 찾는 한국인이 그렇게 많구나라고 놀랄 때쯤 내 양 옆으로 꽉꽉 찬 짐을 들고 한국인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또 프라하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성질 급한 한국 관광객들은 얼른 짐을 던져두고 카를교로 구시가지로 프라하 성으로 존 레논 벽으로 빠르게 달려간다. 단 1분도 허비할 수 없다는 듯 더 많은 곳을 밟고 더 많은 사진을 찍으러 바쁘게 움직인다. 역시 일 잘하는(혹은 쉬지 못하는) 한국인들. 천성이 게을러 숙소에 도착해서야 어디를 가볼지 체코어로 안녕하세요는 무엇인지 찾아보고 있는 나는 빵점 관광객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는 이미 글러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일단 한잔하러 간다.
어느 나라 맥주가 최고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 자리에서 콜로세움이 열릴지도 모른다. 역시 원조인 독일이 최고라는 사람들, 다양성의 벨기에를 꼽는 사람들, 미국의 크래프트 비어들을 찬양하는 사람들. 옆에서 박쥐처럼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고 고개를 끄덕이느라 바쁠 나는 어디를 택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래도 맥주 하나 때문에 또 가고 싶은 나라는 역시나 체코라고 부끄럽지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일 유명한 체코 맥주는 아마 코젤일 것이다. 검은 흑맥주를 담은 유리잔 위에 시나몬 가루를 듬뿍 뿌려 달달한 맛과 시나몬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코젤. 물론 코젤도 유명하지만, 체코 맥주의 진가는 필스너 우르켈(Plzeňský Prazdroj, Pilsner Urquel)에서 비롯된다. 전 세계 맥주 대부분을 장악한 라거 맥주의 원류 격인, 필스너 맥주의 원조다. 필스너 우르켈에서 우르켈 자체가 오리지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필스너란 단어도 프라하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필젠이라는 도시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시는 카X, 하이X, 테X 등의 조상이 이 필스너 우르켈이다.
필스너 우르켈 할아버지의 위대함은 이쯤으로 각설하고, 필스너 우르켈과 코젤은 체코에서 마셔야 한다. 카를교의 풍경이, 구시가지의 야경이, 프라하의 연인들이 술맛을 더 프라하스럽게 해 준다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탱크 펍들의 존재 그 하나 때문이다. 그 하나 때문에 체코 맥주를 마시러 우리는 오늘도 프라하를 꿈꿔야 한다.
탱크 펍은, 프라하 시내 곳곳에 있는 맥주를 커다란 맥주 탱크에서 그대로 뽑아 판매하는 맥주 전문 펍이다. 주로 필스너 우르켈을 취급하는 곳이 많으며, 코젤 탱크 펍도 간간히 보인다. 같은 맥주여도 탱크 펍의 맥주가 우리가 캔과 병으로 마시는 맥주와 맛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저온살균의 부재와 중력 그리고 기압의 이용 때문에.
우리가 마시는 생맥주는 멀리서 왔더라도 그리고 오래되어도 보존기간이 꽤나 길다. 맥주를 만든 후 파스퇴르제이션이라 불리는 저온 살균법으로 살균 처리하여, 보존기간을 늘려 오랫동안 신선하게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당연히 저온 살균이라고 하더라도 맥주에 열을 가하는 방식은 맥주의 맛을 바꾼다. 탱크 펍의 맥주는 이 파스퇴르제이션 기법을 이용하지 않은, 맥주 공장에서 맥주 탱크에 바로 넣어 2주 안에 소비해야만 하는 맥주들이다. 그래서 이 탱크 펍은 양조장에서 가깝고 유통과정이 극단적으로 짧아야 한다. 맥주 공장에서 맛보는 신선한 맥주 그 자체의 맛을 위해서.
또 탱크 펍들은 커다란 탱크를 주로 높은 곳에 두고 이용한다. 이는 중력과 기압을 이용해 탱크에서 그대로 잔까지 맥주를 담기 위한 방법이다. 일반적인 생맥주들은 은색 메탈 케그(keg) 통에 담겨 있다가 이산화탄소를 주입하여 맥주를 뽑는 식이다. 하지만 탱크 펍들은 이 이산화탄소 사용을 최소화하여 맥주와 거품의 맛을 새롭게 한다. 그래서 탱크 펍들에선 거품 그 자체의 맛을 중요시 여기며 거품의 양이 일반 맥주들보다 많고, 거품 자체만 주문해서 마시기도 한다.
이 점들을 상기하며 필스너 우르켈과 코젤을 마시다 보면 맥주에서 부드러움 그 자체가 요동친다. 그래서 진정한 코젤에는 시나몬 가루가 필요 없다. 시나몬 가루는 코젤의 향을 해칠 뿐이다. 체코의 찐한 음식들을 먹으며 필스너 한잔, 코젤 한잔을 비우다 보면 이 오래된 펍의 역사와 함께하는 탭 마스터들이 보인다. 배불뚝이 아저씨들은 혼자 탭 앞에 굳건히 서서 주문이 들어오면 빠른 손놀림으로 잔들을 채운다. 그러다 조금 잘못 따른 것 같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본인 입으로 쑤셔 넣고 다음 잔을 준비한다. 몇십 년을 그렇게 해왔으니 맥주 배는 거짓말을 못하지. 나도 질 수 없다는 듯 또 입을 맥주 거품에 묻힌다.
프라하 여행은, 내일부터 시작하자. 아아 오늘도 나는 빵점 관광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