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이야기 한점
내 방랑 생활 곳곳에서, 아니 그 이전 20대의 시작부터 나와 내 여행은 술을 빼놓곤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혼자 자취를 해서, 사람 만나서 밤새 떠들고 노는 게 좋아서 이것저것 주종을 가리지 않고 무엇을 마시는지도 모르는 채로 부어라 마셨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면서 부대에서 진정한 주당 선후임들을 만나면서 술부심은 격하게 꺾여버렸다. 그 후부터는 좀 더 다양한 술을 아는 체하며 마시는 게 내 술부심 인 양, 칵테일들과 해외 주류들, 맥주들에 빠져들어 갔다. 세계일주와 방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의 여행에서도 항상 그 나라 혹은 도시의 (우리나라의 도시들도) 유명 전통주와 맥주를 꼭 탐닉했다. 혼자 마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다음날 숙취가 심할 걸 알면서도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곤 했다. 물론 세계일주를 하면서부터는 전 세계의 더 다양한 술들을 접할 수 있었다.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국가별로 역사가 짧거나 본인의 문화인지 타국의 문화인지 헷갈리는 불분명한 나라들이 많을지 언정 자신들만의 술이 없는 나라는 없다. 그것이 전통주인 경우도 있고, 생각보다 근래에 나온 술인 경우도 있다. 또 전통주가 아니더라도 지역 맥주나 국가 맥주라도 꼭 있는 편이다. 남태평양의 동떨어진 섬 뉴칼레도니아에도 그들 만의 맥주가 있고, 유럽에서 제일 작은 국가인 리히텐슈타인에도 지역 맥주가 있다. 작다면 작은 우리나라에도 각 지역별로 지역 특산물 혹은 지역의 이야기가 담긴 전통주나 소주가 있다. 옆 나라 일본의 니혼슈(우리나라에선 사케라고 부르는)의 지역별 다양성은 말해 뭣 하랴.
많은 사람들에게 술은 단순히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음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술 안에는 긴 역사와 많은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증류주와 발효주의 차이는 해당 지역이나 계층 간의 경제적 차이를 몰래 보여주기도 하고, 많은 국가 그들 만의 전통주들의 재료들은 그 지역의 기후와 환경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또, 한국인들의 영혼의 동반자 소주가 우리나라 주류 시장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역사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금주령 기간에 발명된 수많은 칵테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이야 말로 밤새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천일야화의 셰하라자드도 술꾼이었다면 천일동안 이야기하기가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다 보면, 누군가에겐 음식이, 누군가에겐 풍경이, 또 누군가에겐 사람들이 머릿속에 남는다. 나의 경우에는 그 나라에서, 그 지역에서 접할 수 있었던 특이한 술들이 내 추억 속의 장면들과 오버랩되어 기억으로 저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알코올 중독자처럼 술에 절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하루하루를 보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장소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술을 시도해본 것 같다. 또 반복된 일상에서 마시는 반복된 술들도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술에 담긴 이야기, 역사, 배경들에 나의 추억이 녹아들어 가 나만의 잊을 수 없는 술병으로 남아 차곡차곡 숙성되어가고 있다.
앞으로의 방랑지에서는 또 어떤 술이 나의 이야기가 될지 기대되고 설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