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i Kim Jun 11. 2022

좀 망가졌어도 이대로 좋아

신혼집에 불 난 썰

생활의 흔적을 싫어한다. 바의자에 보이지 않는 김칫국물이 조금만 묻어도 락스와 퐁퐁과 아세톤을 대동해 바득바득 닦아낸다. 명상을 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면 ‘생각을 비우자’고 생각하면서도 ‘끝나면 저거부터…’라고 취할 행동을 계산한다.


중학교 때 과학 문제집 필기가 마음에 안 들어 해당 페이지를 복사해 다시 예쁘게 필기한 뒤 테이프로 붙이기도 했다. (과학을 유난히 좋아하진 않았고, 유난히 어려워 했다. 고1때 거속시의 등장과 함께 포기했다) 모든 것에 깔끔을 떨진 않는다. 내 거라고 여기는 것, 아끼는 것, 사랑하는 것에 지나치게 완벽을 고집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하자가 생기면 한동안 정신 소모를 하다가 해결법을 찾아낼 때까지 몰두한다. 하루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큰 스트레스여도 당장 만족감을 해치는 것을 두고볼 수 없다.



나의 가장 큰 기쁨이자 만족 대상이었던 집에 불이 났다. 119를 부를 정도로 큰불이었다. 천운으로 다치지 않았지만 집이 연기로 가득했고 벽과 천장에 새까만 그을음이 졌다. 커튼에 구멍이 뚫렸고 불이 지나간 뒤에 화장실 세면대와 옷장 속, 침대 위 인형까지 재로 얼룩졌다. 나는 망연해져서 이날 최소 여섯 번은 울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오셔서 청소를 도와주셨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있다. ‘이참에 인테리어나 다시 해보자’고 행복회로를 돌리고 나름대로 집을 재단장했다. 그날 그날의 투두리스트가 많아 틈이 나면 퐁퐁질을 하고 세탁을 하고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고 있다.



오늘은 커피를 마시다가 아끼는 책에 쏟았고, 소파에도 몇 방울 흘렸다. 김치 얼룩까지 묻혔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물티슈로 벅벅 문질렀다. ‘아 뭐됐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제는 생활의 흔적이 묻어나는 게 소모품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나조차도 얼룩이 지고 때가 탄 적이 수도 없이 많은데 왜 집은, 물건들은 당연히 온전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직도 슥 닦으면 재가 묻어나오는 집을, 그을음이 져 거뭇거뭇한 천장과 벽을 나는 이대로 사랑하기로 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함께 살아야 하는데 조금 해졌다고 새 것으로 바꾸려는 내 태도가 거만하고 유난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뭐 그럼 그렇지’라며 패브릭 소파에 묻은 커피를 닦으니 1초 만에 지워진다. 나만 아는 소파의 역사가 생긴 것 같아 재밌기도 하고 소파와 이상한 유대감도 든다. 물건도 사람도 때가 지고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애정이 생기나는가 보다. 엉뚱한 소리 좀 해봤다. 그냥 나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집을 더 사랑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