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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05. 2024

킬링 디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2017)


킬링 디어와 기이함


익숙하지 않은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 기이하다는 말을 내뱉곤 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상황과 장면은 현실이 아닌 영화 안에서만 머물러 있음을 뚜렷이 느끼게 한다. 즉, 일상적이지 않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엇나간 예측


관객에게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티븐과 마틴이 만난다. 두 사람 사이엔 은밀한,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감춰져 있는 듯하다. 여기서 스티븐에게 마틴은 약점이란 인상도 받을 수 있다. 스티븐은 시간이 갈수록 마틴을 멀리한다. 이러한 상황과 느낌은 그들 사이에 '사랑'이 존재했음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전제 위에서 사랑으로부터 외면받은 이가 어떻게 '광기'에 젖어 들고 이를 표출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라 기대하게 한다.


영화를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이는 잘못된 추측이란 것을 알 것이다. 마틴은 그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천한 것뿐. 문제는 나의 이 엇나간 예측이 영화를 보는 내내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있어야 할 사랑의 부재가, 특히나 이를 자꾸만 명확히 하려는 스티븐의 태도가 화를 자초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형성한다. 또한 이 비밀스러운 상황이 언젠가 깨질 것이란 예상도 불안을 자극하는 데 일조한다.


다시 말하지만 난 상황을 잘못 예측했다. 그 때문에 사실을 만난 순간 앞서 말한 모든 불안이 깨져버렸는데 그때 이런 상황으로부터 기이함을 느꼈다(물론 다른 요인이 함께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렇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존의 많은 다른 작품이 대체로 그렇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거의 학습으로부터 형성된 믿음이 예상과 편견으로부터 나만의 익숙하고 당연한 현실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로부터 동떨어진 세계를 마주하게 되면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간에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기괴하다'고 말하게 한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첫째, 다리를 못 쓰게 된다.

둘째, 거식증에 걸린다.

셋째, 눈이 충혈된다.

마지막, 죽는다.


의학적으로도 밝힐 수 없는 약물의 힘인지, 최면술인지, 어떤 미지의 힘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마틴이 보여준 이 놀라운 능력은 내가 영화를 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말도 되지 않는 능력은 이 모든 상황이 영화 안에 갇히게 한다. 이는 내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안도감을 준다. 그렇게 상황(인물 간의 갈등과 같은)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두려움도, 공포도 영화 안에서만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 안도감이 오히려 이질감을 증폭시킨다. 영화의 분위기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카메라의 구도도, 온 신경을 찢거나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음향도, 상대를 염탐하는 이들의 눈빛도, 인간미라곤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사람들도, 비인간적인 선택의 과정도.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안전하다. 영화 속 안정적이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상황이 불안감을 주다가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안도감을 일깨운다. 그러다 안도감을 무너뜨리고 또다시 다독이길 반복한다. 이러한 상황의 연속이 감정의 고저를 짧은 주기로 넘나들고, 더 큰 불안을 만들고, 이질감을 주고, 기이함을 만든다.



인간의 부재


기이하면서도 한편으론 기계적인 분위기에는 연출의 힘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익숙한, 현실적인 인간은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린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뿐만 아니라 이들의 결합으로부터 파생된 복합적인 감정을 무수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인물에게선 인간이라면 대부분 지니고 있는 이런 다채로운 형태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아주 단순한 형태의 감정만이 정돈된 형태로 드러난다. 배우들이 보여주는 이 절제된 감정, 단순화된 감정이 또 다른 형태의 비인간성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낯선 세계를 만나게 한다.



철저히 단절된 세상


감정의 교류라곤 전혀 볼 수가 없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삶, 주어진 역할에만 맞춰 움직일 뿐이다. 이들의 삶은 일부를 도려내도 문제없이 잘 돌아갈 것이다. 자신 앞에 놓인 삶만 정확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삶에선 연속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때의 연속성이란 개인에 국한된 시간을 뜻하는 게 아니다. 환경, 사회, 사람들 틈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이곳으로도 저곳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관계의 연속성을 말한다. 아무리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 사회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연속성의 부재는 부자연스러움을 낳고 불편함(정확히는 불안감)을 안겨주고 기괴하단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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