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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비 Sep 22. 2022

[소설 리뷰] 당신의 멸망은 희망적입니까

이사카 고타로 『종말의 바보』

먼 우주에서 지구를 향해 소행성이 날아든다. 직경 10킬로미터 크기에 초속 20킬로미터의 속도다. 이미 5년째 궤도 변경 없이 잘 날아오고 있고 3년 뒤면 지구와 충돌한다. 그러니까,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달랑 3년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공룡이 사라진 것과 같은 이유로, 지구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생명체는 죽게 된다. 멸망이다.

      

당연히 세상은 엉망이 됐다. 사람들은 공포와 절망, 분노에 빠져들었고 그런 감정을 이겨내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타인의 목숨, 적어도 타인의 물건(주로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는 약탈자가 됐다. 식량을 찾아 혹은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집을 떠난 이들은 종종 되돌아오지 못했고 그렇게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누군가는 삶을 이어간다. 죽을 용기가 없었든 죽기 싫었든 아무튼 그렇게 살아간다. 몇 년쯤 지나자 혼란도 어느 정도 진정됐다.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으며 마지막 날이 가까워질수록 다시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도 크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다.

      

“모두가 지친 게 확실했다. 서로 빼앗고 제멋대로 행동한들 소행성의 충돌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느긋하고 평화롭게 살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143p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 『종말의 바보』는 이런 상황, 3년 뒤면 종말을 맞게 될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양한 등장인물의 면면은, 종말을 앞둔 상황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삶의 방식은 흥미롭다. 3년 후면 지구가 결딴나는 판국에 누군가는 진득하니 격투기를 익히고, 누군가는 새 애인을 찾아 나서며, 또 다른 누군가는 최후의 날 홍수로 물에 잠긴 도시를 굽어보기 위한 망루를 세우는 일에 몰두한다.

      

가볍게 읽히고 일본 소설 특유의 발랄함이 곳곳에 묻어있지만 작가가 던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묵직한 화두는 『종말의 바보』를 그저 재미난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이를테면 이런 고민 앞에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오랜 세월 생기지 않아 포기했던 아기가 종말을 앞두고 덜컥 들어섰다면. 낳아봐야 3살이면 죽을 아이를 당신은 낳을까, 포기할까. 또 이런 경우도 있다.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를 찾아낸 당신, 어차피 3년 후엔 죽을 원수이지만 그 전에 복수를 감행할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던 소위 ‘정상적인’ 세상의 원칙들, 이를테면 질서와 정의, 또는 지속가능한 사회 구조 따위가 무너져 내린 자리를 대신 채울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되돌아갈 수 있다는, 어쩌면 멸망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조차도 품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린 모든 걸 포기한 채 암울한 나날을 보내야 할까. 작가는 소설을 통해, 어쩌면 희망이란 그리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을 건넨다.

     

“어떻게 되든 3년이라고요. 최대한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 안 들어요?”

“세상의 종말이 평화로울 리 없잖아.”

“세상을 어쩌라는 게 아녜요. 이 집 말이에요. 세상은 무리라 해도 이 집 정도는, 우리 정도는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거 아녜요. 내 말이 틀려요?” 205p

     

세상은 멸망을 향해 가지만, 소설 속 이 사랑스러운 인물들은 절망하는 대신 각각의 할 일을 찾고 지속한다. 동창을 찾아 축구 모임을 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손님을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하고, 어렵사리 식료품을 구해 가게를 운영한다. 그걸 ‘희망적’이라 부르기에는 어색한 감이 없지 않지만 아무튼 소설 곳곳에선 ‘희망적인’ 향기가 솔솔 풍긴다. 어쩌면 절망의 반대 지점엔 무언가를 지속하는 삶,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달리 무슨 도리가 있을까.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묵묵히, 서툴게,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것밖에는 없는 것처럼, 나에바 씨는 달리고 있다. 달리 어쩌라는 거냐, 라고 물으면서.” 211p

     

그렇게 삶을 이어갈 때, 삶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결국 ‘그래도 살아볼만한’ 삶에 가 닿는다. 슬픈 일이지만, 3년 뒤에 종말은 찾아올 것이며, 그러므로 아직 3년이, 어쩌면 3년이나 남았으므로 우리는 화해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사랑하는 이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길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 다가올 종말의 교훈이란 ‘할 수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쯤 되지 않을까.


“힘내서, 어쨌거나, 살아라.” 335p

“죽어도 안 죽어! 죽어도 안 죽어!” 348p

     

이사카 고타로는 2000년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내 온갖 문학상을 휩쓸며 일본 문학의 차세대 주자로 불린 작가다. 현재 일본 내에서의 위상은 알 수 없지만 국내에도 꽤 많은 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18년에는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영화 ‘골든 슬럼버(노동석 감독, 강동원 주연)’가 만들어져 관객을 만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10여 년 전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하고는 단박에 팬이 됐다. 국내에 꽤 많은 작품이 소개돼서, 집 거실 책장의 한 칸은 전부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로 채웠을 정도다. 혹여 그의 소설이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종말의 바보』와 함께 『사신 치바』, 『러시 라이프』를 적극 추천한다.

        

옴니버스식 구성(이건 이사카 고타로의 주특기라고 생각한다)의 8가지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 맞물리는 재미 또한 이 소설의 매력이다. 2006년 초판 발행된 랜덤하우스코리아의 책은 현재 절판됐고, 현대문학에서 2015년 펴낸 개정판을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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