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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비 Sep 27. 2022

[소설 리뷰] 욕망과 광기에 관한 두 가지 보고서

오노레 드 발자크 『미지의 걸작』

작가 지망생 시절, 내게 소설 작법을 가르쳐준 원종국 소설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만약 악마에게 신체의 일부를 내어주는 대신 소설을 잘 쓸 수 있는 재능을 얻을 수 있다면 어느 부위를 얼마나 내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는 거다. 그는 아마도 손가락 정도는 내어줄 수 있지 않겠냐면서, 여러 개가 없으면 타이핑을 못할 테니 기껏해야 두세 개 정도가 아니겠냐는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가에게 소설을 잘 쓸 수 있는 재능이란 축복이자 욕망이다. 물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으니 이미 소설가가 됐겠지만, 좋은 걸 넘어 시샘을 일으키는 다른 작가의 소설이나 걸작으로 불리는 고전을 마주했을 때, 또는 소설이 써지질 않아 미칠 지경에 이르면 스스로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며 신을 원망하게 되곤 한다. 이러니 악마와의 거래일지언정 덥석 붙들 수밖에.



비단 문학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다.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에 종사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생명을 덜어내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을지언정, 영혼을 팔고 사랑하는 이를 버릴지언정 그 눈부신 재능을 내 것으로 만들어 역사에 남을 걸작을 창조하고픈 욕망을 떨쳐낼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궁극의 예술을 향한 욕망은 종종 광기에 비견되는 게 아닐까.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은 미술, 그 중에서도 회화를 소재로 전에 없던 걸작을 완성하고자 하는 노화가 프렌호퍼의 욕망과 광기를 다룬다. 발자크가 프렌호퍼의 입을 빌어 풀어놓는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흥미롭다. 시대를 풍미한 거장들의 화풍이 설명되며, 프렌호퍼가 가상의 인물인 것과는 달리 16~17세기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푸생과 포르뷔스는 아예 등장인물로 그려냈다.

      

천재 화가 프렌호퍼는 그림을 넘어선 그림, 생명력을 품고 살아 숨 쉬는 그림, 완벽한 형태와 본질에 도달한 그림을 꿈꾼다. 그림은 평면을 넘어, 영혼을 품고 감각을 입어 현세에 실존한다.

     

“자네는 생명의 겉모습을 그리지, 그것의 넘쳐흐르는 충만함을 표현하지는 못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영혼인 그것, 육체 위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그것을 표현하지는 못하지. 티치아노와 라파엘로가 간과했던 그 ‘생명의 꽃’ 말이야.” 86p

     

그렇게 위대한, 세상에 없던 걸작을 완성키 위한 작업은 십 년간 이어지고, 그는 결국 추구해온 ‘미지의 걸작’을 완성해 세상에 내놓는다. 그림 속 여인 ‘카트린 레스코’는 그에게 그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여인이다.

   

“우리가 라파엘로의 인물들과 아리오스트의 안젤리카,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실제로 가질 수 있겠는가? 아닐세! 우리는 그저 그 모델들의 형상만을 볼 뿐이지. 그렇지만 내가 저기에 빗장을 걸어놓은 작품은 우리 예술에서도 하나의 예외야.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야! 나와 함께 울고, 웃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여자이지…… 이 여자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나의 창조물이야.” 116p


“내 작품은 완벽하네. 나는 이제 자랑스럽게 그걸 보여줄 수 있지. 그 어떤 화가도, 붓도, 색깔도, 화폭도, 빛도 ‘카트린 레스코’와 경쟁할 수 없을 걸세.” 124p

     

광기는 종종 파국으로 이어진다. 발자크의 뛰어난 상상력 또한 소설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고, 이야기는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다. 천재의 손끝에서 완성된 욕망, 강렬하고 억누를 수 없는 그 욕망의 끝은 창조자를 비롯해 이를 마주한 이들 모두에게 강한 충격을 안긴다.

      

「미지의 걸작」은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폴 세잔은 이 소설을 읽고 “프렌호퍼가 바로 나다!”라고 외쳤고 피카소는 기꺼이 삽화를 그려 넣었다. 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유쾌한 역설로 가득한 소설’이라며 이 책을 권했고 엥겔스는 ‘발자크론’을 집필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자크 리베트의 1991년 작 「누드모델」은 이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다.


녹색광선이 펴낸 『미지의 걸작』에는 표제작인 「미지의 걸작」 외에 발자크의 또 다른 단편소설인 「영생의 묘약」이 함께 실려 있다. 영생, 또 한 번의 삶을 가능케 하는 묘약을 둘러싼 이야기로 인간의 깊은 욕망을 다뤘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닮아있다. 책의 말미에는 옮긴이인 김호영 한양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의 해설과 영화 「누드모델」의 주요 장면 및 줄거리, 소설 속에 언급된 화가들의 소개와 대표작을 부록으로 실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소설을 흔히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소설 읽기에는 꽤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과 집중이 요구된다. 19세기에 쓰인 고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반면 『미지의 걸작』에 실린 두 작품은 짧은 분량과 깔끔한 번역을 통해 부담 없이 읽어볼 만하다. 우리의, 인간의 내면 깊숙이 이글거리는 욕망과 마주하는 특별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누려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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