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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코드 스웨덴 Aug 01. 2019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에는 일기를 쓰는 것이 싫었다. 누군가가 읽던 읽지 않던 내 생각이나 마음을 어느 한 곳에 적어 놓는 것이 그렇게 쑥스럽고 어색할 수 없었다. 내가 어릴 적에도 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인 시절이 있었는데 항상 문방구에 가서 예쁜 다이어리를 신중히 골라서 사놓고는 한 자도 적지 않고 새것 그대로의 상태로 남겨두기 마련이었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 스터디 플래너가 유행일 때에도 나는 고심해서 플래너를 사놓고 제대로 한 번도 책장에서 꺼내본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내 글을 공유하고 있는 모습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이제 와서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이야기할 상황이 없어진 것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스웨덴에 와서는 가족 친구와 통화할 일이 아닌 이상 한국어로 말할 일이 없어졌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나고 산 사람인지라 한국말로 생각하고 외국말로 사는 것이 알게 모르게 답답했는 모양이다.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은 진야를 만나고 난 후부터다. 작년 여름에 체코에 살던 친구를 만나러 프라하에 가서 그 집에서 몇 밤을 잤는데, 그때 내 친구의 룸메이트 진야를 알게 됐다. 진야와는 처음 보는 사이었지만 금세 친해져서 그때로부터 한 달 뒤에는 진야가 스웨덴으로 놀러 와서 우리 집에서 몇 밤을 자고 갔다. 그중 하루는 나도 함께 여행하는 느낌으로 쇠데르 말름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곳들을 함께 둘러봤는데, 그 날 길에서 호랑이 무늬 셔츠를 입고 상투를 튼 남자를 봤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진야가 핸드폰 메모장에 일기를 쓰는 모습을 보고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호랑이 무늬 셔츠를 입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나도 호랑이 무늬 셔츠를 입은 사람이 되고 싶다. 길에서 본 그 사람은 예쁘지도 멋있지도 않은 호랑이 무늬 셔츠에 아주 뜬금없이 상투까지 틀고 있었는데 걸음걸이만큼은 당당하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신만 좋으면 그만이지 싶은 그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아웃핏이 좋았다. 나도 그런 호랑이 무늬 셔츠를 입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일 년이 지나 또다시 해가 지지 않는 파란 밤의 여름이 왔다. 돌이켜보면 나는 일 년 동안 호랑이 무늬 셔츠 입은 사람을 동경하고 어쩌면 나를 바꿔서 멋진 사람이 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글쎄 난 호랑이 셔츠를 입을 용기도 상투를 틀만큼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나는 나답게 사는 게 그만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동경할 필요도 다른 나 자신에 대해서 슬퍼할 필요 없다. 나는 그냥 나답게 흔들리지 않고 단단한 사람이 되면 그뿐이다. 행복은 이상을 좇아서는 가질 수 없다. 행복은 내가 나를 알고 자신 그대로가 될 때 그제야 오는 것 같다.


한 동안 브런치에 글을 남기지 못했다. 졸업 논문을 쓰느라 사느라 바쁘기도 했고 어느 순간 글을 쓰는 것에 대해 흥미를 잃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글을 쓰는 것이 가장 나답고 즐거운 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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