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가 필요하다//
가까우면 상처입고/ 멀어지면 소원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
다가서면 따뜻하고/ 물러서도 편안한/ 마음의 간격은 얼마인가//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마음 속 거리만 재고 있다//(졸시, <관계> 전문, 졸시집「묵언」중에서)
‘관계’란 말은 참 미묘하다. 인간관계, 사회관계, 국가관계 등 관계는 하나의 ‘망(網)-그물’이다. 인터넷(internet)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網-그물(net)’은 상호적(inter)이다. 혼자서는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노릇이니 관계는 둘 이상의 사람이 있어야 맺을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서로 무리를 짓고 집단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중심에 관계가 있다. 국가를 향한 투철한 애국애족과 도덕적·윤리적 우월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관계’란 마치 요술방망이와도 같다. 사회적 지위 고하를 묻지 않고 “사람이 그러면 못써.”라는 단 한마디 말로 어느 개인에 대한 평가는 끝난다. 그 개인이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개인을 평가할 때는 추상적인 도덕적·윤리적 판단이 우선한다.
몇 해 전 어느 케이블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미생>이란 드라마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갑(甲)의 지위에 있는 정규직에 비하여 계약직사원인 ‘장그래’는 을(乙)의 입장을 대변한다. 갑과 갑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묵약(黙約)’이 있다. 실력이 부족하고 인격에 문제가 있더라도 일단 갑과 갑 사이에는 서로 밀고 당겨주는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2년 계약에 묶여있는 ‘장그래’는 인품도 반듯하고, 고졸임에도 업무 수행 능력도 충분하다. 하지만 비정규직으로 을의 입장에 서있는 ‘장그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정규직인 갑과는 안정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우리 사회 구성원의 90 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시민들은 ‘만년 을’이다. 단지 10 퍼센트 밖에 되지 않음에도 우리 사회의 절대 강자인 ‘수퍼 갑’과 ‘만년 을’이 정상적 관계를 맺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난한 집 딸인 신데렐라가 ‘백마 탄 왕자’인 대기업의 외동아들을 만나 결혼을 통해 벼락신분 상승을 한다? 동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하는 ‘가상현실’이다.
이런 현실 상황에서 청년들이 도전과 창의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삶에 대한 도전은 곧 기존 관계에 대한 도전이다. 또한 창의적 삶을 산다는 것은 곧 기존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불확실한 모험의 삶을 사느니 젊은이들은 안정적 삶을 추구한다. 그 대안이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을 하고 헌신해야 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현실안정적인 직업에 목을 매는 오늘날의 풍조가 우려스럽다.
기성세대가 성장하고 교육받을 때보다 오늘날의 현실은 사회경제구조는 훨씬 복잡다단하고, 변화의 속도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빨라졌다. 특히 인터넷이 도입되고 활성화된 20세기 후반부터 정보와 결합된 자본권력은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우리의 현실과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정치망(定置網)이 되어 ‘빅브라더’처럼 우리의 삶을 감시하고 옥죄고 있다. 현실 사회는 겉으로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지만 내부적으로 공사적 모든 관계를 규율하고 있다.
이 강고한 지배체제 아래서 우리는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 간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는 이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무엇보다 ‘거리(혹은 간격)두기’가 필요하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인맥으로 얽혀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 혹은 간격이 필요하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너무 밀착되어 있어 조금의 틈도 없다. 우리에게는 ‘여유’, 즉 ‘틈’이 필요하다. 우리의 관계는 이 여유(틈)가 없다. 사랑을 이유로 속박하고, 대의를 이유로 희생을 강요한다. 이것이 국가의 개인에 대한 ‘애국애족’으로 나타나고, 개인의 개인에 대한 ‘희생과 봉사’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이니 개인은 어느 하루 편할 날이 없다. 이 관계 속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내 한 몸 숨길 손바닥 만큼의 그늘(피난처)도 없다.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가정 내에서 잠시나마 편히 숨 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도 없는 이 사회가 과연 바람직할까?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틈과 여유를 줘야 한다. 타인의 간섭이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이 멋대로 꿈꾸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줘야 한다. 국가와 기업도 더 이상 국민과 직원에게 애국애족이나 희생과 봉사하기를 강요하지 말자. 국가와 기업이 그들을 존중하고 여유를 준다면, 시민들과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국가와 기업을 위해 헌신하리라.
하지만 아직은 국가와 기업을 너무 믿지는 말자. 우리가 믿을 곳은 그나마 가정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물러서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효도하기를 강요하기 보다는 부모가 자녀에게 먼저 사랑을 베풀자. 대신 지나치게 기대하지는 말자. 자녀도 부모를 배척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고 존경하자. 대신 지나치게 요구하지는 말자.
주변을 돌아보면, 가족들끼리, 연인들끼리, 친구들끼리 평생 너와 나의 마음의 거리만 재다가 허송세월하는 사례를 보곤 한다. 사랑하며 살아도 부족하고 아까운 인생이다. 서로 마음의 거리만 재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말하고, 싫으면 싫어한다 말하면 된다. 다만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너무 다가서지도 말고, 너무 물러서지도 말자. 적절한 마음의 거리를 두고 관계를 유지하자. 그 적정한 거리만 유지한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행복하고 윤택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