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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복 Dec 08. 2019

자작시로 읽는 에세이(6)-꿈

나는 꿈꾸지 않는다/ 꿈이 사라진 것인지/ 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인지/ 꿈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현실은 잠재의식에 거친 흔적을 남기고/ 피곤에 절은 육신과 영혼은 휴식을 원한다/ 잠은 달콤한 휴식이라고 믿는 나는/ 밤새 악몽에 시달리고/ 매일 아침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 잠에 대한 믿음과 배신으로 절규한다/ 꿈꾸지 않으리라/ 스스로 최면을 건다/ 언제부터인가/ 꿈은 사라지고/ 현실은 몽롱한 안개 속 꿈과 같다/ 꿈을 부정할수록 꿈꾸듯 현실을 산다/ 미치도록 피하고 싶은 현실은/ 실감나는 나의 꿈이다//졸시 <꿈> 전문, 졸시집, 「묵언」중에서)


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왜 그렇게 미래의 꿈(직업)에 대해 물었을까?


“넌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대통령이요.”


형식적인 질문에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 때는 이 땅의 대통령은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또 누구나 원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라 말하지 않으면 돌아올 후환이 두려웠다. “사내자식이 조잔하게 꿈이 그게 뭐냐. 꿈이 그렇게 작아서 뭘 할 수 있겠어?”라며 핀잔을 듣거나 놀림을 당할까 겁났다.


나는 꿈꿀 자유가 없었다. 어른들의 꿈이 어린 내게 강요되고 주입되었다고 하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더러는 내 꿈이 나 자신이 정말 원하는 꿈인지 아닌 지도 헷갈렸다. 사실 나는 한때는 과학자가, 또 어떤 때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그러다 철학자가 되고 싶기도 했다.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꿈은 수시로 바뀌었다. 그 때는 장래의 내 모습과 직업에 대한 아무런 인식도 없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다. 성장통으로 한 몸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하늘의 달과 구름만 쳐다보고 다닌 나는 현실의 삶과 꿈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알지 못했다. 아니 꿈과 현실은 물론 미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고3때 학력고사(수능)를 치르고 나서 대학입학원서를 작성하던 때의 일이다. 그 때의 꿈은 철학자였다. 나는 호기롭게 어느 지방대학 철학과에 지원하는 서류를 작성하고는 원서접수 첫날 담임 선생님께 들고 갔다. 인터넷으로 원서를 접수하는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는 직접 원서를 작성하여 담임 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의 확인을 거쳐 지원자가 직접 대학에 제출해야 했다. 서류접수기간이 정해져있어 수도권 소재 대학에 지원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먼저 서류를 쓰게 했다. 지방 소재 대학은 당일 접수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마지막에 서류를 작성해주었다. 교무실은 수도권(정확히는 서울)에 있는 모모대학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지원서를 작성하느라 분주하였다. 대입원서 접수 첫날, 눈치도 없이 선생님께 불쑥 서류를 내민 게 잘못이었다.


선생님 왈: “니는 임마 지방대 지원하는 거 아이가? 바쁘니까 맨 마지막 날에 와!”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는 남은 것이라곤 자존심 밖에 없는 내 가슴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서를 찢어버리고는 곧장 재수를 결심했다. 그날 철학계의 거목은 꽃 한번 피워보지도 못하고 무참하게 쓰러져 버렸다.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갈 길도 잃은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그렇잖아도 큰형은 아버지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철학과 지원포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철학과=사주관상쟁이=백수’라는 등식에 사로잡힌 기성세대의 관념의 틀을 넘어 설 힘이 내게는 없었다. 한번 꿈이 꺾이고 나니 스스로 자신도 없고, 확신도 사라져버렸다.


재수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세무대(稅務大)에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가 학보를 보내왔다. 학보에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이란 고시합격자 수기집이 광고로 실려 있었다. 그 광고를 보는데 두 눈이 확 떠지는 느낌을 받았다. 운명의 장난일까. 이 광고는 내 꿈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수기집을 사서는 밤 새워 두세 번을 읽었다. “그래, 사내가 한번 태어난 이상 이 정도 꿈은 꾸어야제.” 그 길로 ‘철학과’에서 ‘법학과’로 전격적으로 방향 수정을 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철학자가 아니라 법학자로 살고 있다. 철학자든 법학자든 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으니 세속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가보지 않은 길’은 늘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 법이다. 철학을 공부했다고 하여 철학자나 철학교수가 될 수나 있었을지, 아니면 올곧게 철학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다. 오히려 법학을 선택했기에 그나마 법학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나간 세월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추구하면 할수록 절망도 컸던 것 같다. 수없이 엎어지고 넘어지며 깨지면서 그로 인한 고통을 참고 다스리느라 기진맥진하곤 했으니까. 젊은 날의 꿈과 현실은 어인 연유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맺어질 수 없었을까? 여전히 안타까운 마음이 남는다.


구태여 꿈꾸지 않아도, 희망하지 않아도 절로 행복한 삶은 불가능할까? 우리 사회에서는 고등학교 성적만으로 꿈과 현실마저도 서열이 매겨지고 개인의 정체성마저도 규정된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는 꿈꾸는 젊음, 희망하는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젊음에게 강요하는 꿈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학벌을 만들어 출세하고 돈을 벌어 부자로 사는 것이다.


억압하고 강요해서라도 자식의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부모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젊음은 꿈꾸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설령 꿈을 꾼다고 할지라도 그 꿈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 청춘들은 자신의 삶에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할 것이다. 고통으로 몸부림칠 것이다. 꿈꾸지 않아도 행복한 청춘은 불가능할까? 꿈꾸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 나날이 일상의 삶이 꿈이 되는 행복한 사회를 꿈꿔 본다. 그 꿈 앞에 또다시 두 무릎을 꿇는다 할지라도 기성세대인 내가 청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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