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로 읽는 에세이(8)-아침에 도를 들으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의 말에는/ 욕심이 가득하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즉시 죽을 일이다//
저녁까지 기다려/ 죽을 이유가 있는가//
순간에 살고/ 순간에 죽을 일이다//
지금 도를 들으면/ 지금 죽을 일이다//
티끌만큼의 미련도/ 욕심//
남기지 마라// (졸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졸시집, 「묵언」중에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 조문도석사가의).”
논어 <이인 里人>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이 말은 한 평생 인의(仁義)을 추구하며 살아온 공자의 탈속(脫俗)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똥 밭에서 뒹굴어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인간들이 삶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벗어던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를 얻으면 두 개, 세 개를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손자가 태어나면, 증손자를 보고 죽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도 공자는 말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오늘 아침에 평생 애타게 구하던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것을 버리고 저녁이 되면 죽어야 한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원통한 일일까?
불가(佛家)에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단박에 깨닫고 그 즉시 실천할 것인가”, 아니면 “단박에 깨닫고 서서히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마치 조선시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둘러싸고 유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쟁하였듯 선승(禪僧)들도 깨달음과 수행의 방식을 두고 오랫동안 갑론을박 논쟁하였다. 이 두 가지 가운데 공자의 말은 ‘돈오점수’에 해당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돈오돈수’를 선호한다. 단박에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즉시 실천해야 한다. 깨달았다고 시간을 두고 서서히 실천하며 곱씹다보면 또다시 오류에 빠지고, 욕심에 휘둘려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군 입대를 전후하여 “仁하고 忍하니 人되니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은 적이 있다. “깨달은 사람으로 죽고 싶다”는 것은 젊을 때부터 나의 서원이다. 청소년기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보낸 내가 혹독한 정신적 방황과 여러 선현(先賢)들의 글과 행적을 대하고 내린 결론은 단 하나. “깨달음을 얻은 온전한 사람으로 죽고 싶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이 말들은 서로 같은 뜻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개인적인 바람을 언어라는 도구를 빌어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학자로서 오십 평생 지식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연륜을 더하고, 알량한 지식이 축적되면 될수록 가슴 속에는 늘 ‘道’, 즉 ‘깨달음’에 대한 열망은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세속의 나이 ‘쉰’을 훌쩍 넘기고 보니 조급증마저 생긴다. 내 딴에는 열심히 道를 구했건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니 나이를 먹을수록 눈앞에는 자욱한 안개뿐이다. 돌개바람이라도 불어 단박에 이 안개를 몰아내주었으면 좋으련만... 이 또한 욕심이겠지.
일체의 미련도 버리려 한다. 나이가 들수록 삶에 대한 미련이 연기처럼 소리 없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이루지 못한 일 이루고 싶고, 가지지 못한 것 가지고 싶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자만심과 남을 깔보고 무시하는 교만이 불현듯 들불처럼 일어나곤 한다. 육신의 기력이 줄어드는 만큼 내면의 욕심은 두 배, 세 배로 늘어나니 여간 큰일이 아니다.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욱 깊으니 그 원인은 모두 욕심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깨달음과 욕심은 악연(惡緣)이다. 그 질긴 악연의 고리는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한다. 어쩌면 죽기 전에 깨달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마저도 욕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욕심이라고 할지라도 죽기 전에 깨달음을 얻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욕심으로 화탕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만큼 나는 무척 행복할 것이다. 아마 행복에 젖은 나는 미소를 머금고 아무런 미련과 후회 없이 이승을 떠날 수 있겠지.
입적(入寂)을 앞둔 선승과 그 제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읽다보면 죽음은 삶의 종착점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게 된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현실의 삶을 대하는 선승들의 모습은 멋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제자: 스님, 아직도 화두(話頭)가 성성(盛盛)하십니까?
스승: 까딱없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또 묻는다.
제자: 여전히 여여(如如)하십니까?
스승: 그대로다.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저승의 문턱에 이르렀음에도 명철한 의식과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생사의 경계를 뛰어넘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구도자의 자세는 숙연하고 비장하다 못해 아름답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이 자명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 죽음을 앞에 두고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한 소식(깨달음)’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간절한 소원으로 살고 있는 내가 만일 아침에 도들 들으면 나의 선택은? 저녁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도를 들은 그 순간에 당장 죽어도 좋다. 삶에 대한 티끌만큼의 미련도 욕심.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이 삶을 마감할 것이다. 죽을 것이다.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