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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복 Dec 13. 2019

자작시로 읽는 에세이(9)-나무

나무는/ 뿌리를 내린 만큼/ 가지를 뻗는다//


큰 나무는 큰 가지를/ 작은 나무는 작은 가지를/ 갈무리할 수 있을 만큼//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휘어지고/ 눈 내리면 쌓이는 대로 휘어지고/ 꺾이고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가지를 뻗는다// (졸시 <나무> 전문, 졸시집, 「바람구멍」중에서)



한 번씩 잠들지 못하는 때가 있다. 자려고 누웠으나 머리에는 수많은 상념이 떠돈다. 이럴 땐 누워서 끙끙거리며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일어나는 게 낫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고르고 상념의 가지들을 정리한다.


기업보다는 훨씬 낫지만 대학도 직장이다. 내가 속해있는 단과대학 내에서 뿐 아니라 전교 차원에서도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교수회를 떠난 이후 평교수로 돌아왔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경북대민교협 의장을 맡았다. 이제는 그 직책마저 내려놓고 집과 연구실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런저런 상황이 나를 압박하고 있다. 마음을 비웠다고는 하나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일이니 모든 일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고, 대학도 사회조직인 이상 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불교에서는 ‘업연’(業緣)을 말한다. ‘업연’이란 “전생(前生)의 업보에 따라 맺은 인연”이란 뜻이다. 선업은 낙과(樂果)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의 인연을 부른다. 업연에 따른 사람과의 인연에 대해 법구경에 이런 게송(偈頌)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지지 마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젊은 시절, 이 게송을 읽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니,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탄식하였다. 인간 사회에서 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싫든 좋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고, 부딪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잖은가?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마라”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연륜을 더하면서 어느 순간 이 게송이 저절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대부분의 오해와 갈등이 ‘지나친 밀착’ 혹은 ‘집착’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 혹은 ‘간격’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다가서고(밀착 혹은 집착),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에게서는 너무 멀어지려는(배제 혹은 배척) 경향이 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 혹은 미워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적당한 거리 혹은 간격을 두고 대하면 그 사랑은 더욱 오래도록 유지될 것이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로 증오하거나 원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는 약 1,200명의 교수가 있다. 모두 자신이 전공하는 학문 분야에서는 나름 최고의 ‘전문가’이자 ‘지식인’이다. 모두 똑똑하고,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여간 강하지 않다. 그러니 시끄럽다. 자신의 소신과 주장이 강하다보니 자칫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교수 한명을 데리고 가기보다 벼룩 백 마리를 데리고 가기가 쉽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할까.


문제는 모두 똑똑하고 잘나다보니 쉽게 타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생 외골수의 인생을 살다보니 동료의식도 약하고, 타인과의 공감능력도 떨어진다. 지식과 논리를 다투다보니 인간을 ‘감성’을 가진 이성적 존재로 대하기보다 이성을 가진 ‘감정’적 존재로 대하곤 한다. 이게 사단의 원인이다. ‘이성’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마비되어 버리면 도무지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성’은 간 곳 없고 ‘감정’이 앞서 ‘이성’을 잃고 만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감성’을 잃은 ‘이성’은 냉정하고, 냉혹하다. 피도, 눈물도, 인정도 없다. 게다가 ‘이성’이 ‘명분’과 결합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된다. 이제는 그 ‘이성’이 총알이 되어 상대의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내고야 만다.  


근대법학은 흔히 ‘이성법학’(理性法學)이라 한다. 소위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대륙법학을 받아들인 우리는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법학을 금과옥조처럼 받든다. 하지만 ‘이성법학’이 현실 속에서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사단칠정()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우리사회에서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은 ‘학벌’과 ‘성적’이다. 이 기준이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또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주관적 성과’로서의 개인의 내면의 가치와 품성 등은 간과 혹은 무시된다. 아니 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판단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기업이나 공무원 임용 등 우리나라 인사 및 채용에 있어 뿌리 깊은 관행이다. 초중고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인간의 본질이나 이성에 대한 깊은 독서와 사색, 그리고 성찰을 할 시간이 없다. ‘지식과 논리’도 ‘학벌과 ‘성적’을 위한 추구 대상일 뿐 깊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대학마저 개인을 ‘학벌’과 ‘성적’으로 평가한다. 이 평가방식은 학생은 물론 교수의 자질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기도 하다.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감성’, ‘인성(품성)’, ‘가치관’ 혹은 ‘잠재적 능력(과 가능성)’ 등은 교수의 자질 판단을 위한 핵심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학벌과 성적에 의거한 평가에 따르는 부수적 고려사항일 뿐이다. 대학에는 학벌과 성적 좋은 교수가 넘쳐난다. 이들이 훌륭한 품격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교수로서 대학 현실을 냉정하게 보면, 다분히 ‘비관적’이다. 책상물림만 한 선생들은 날로 지성인 특유의 예리한 비판정신도, 세상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품성도 잃어가고 있다. 지식인, 지성인 혹은 학자로서 교수는 사람과 사회, 나아가 자연과 우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을 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자신이 전공한 전문지식만을 갖춘 교수들이 미래세대를 이끌 후학들에게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형국이다. 만일 학생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묻는다면, 교수들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대학 내부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는 부끄럽다 못해 창피한 일도 적지 않다. ‘수오지심’을 미덕으로 삼고 있던 우리가 언제부턴가 ‘부끄럼’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식과 논리, 이성과 효율을 신(神)으로 모시고 있다. 학연과 혈연, 그리고 지연에 얽혀 기성정치인과 똑같은 관행을 반복하고 있다.


나 자신부터 반성해야겠다. 먼저 ‘수오지심’을 가져야겠다. 지식을 넘어선 논리, 이성과 효율보다는 감성과 인성을 신으로 모셔야겠다. 우리 사회의 병폐인 학연과 혈연, 그리고 지연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학자로 바로 서야겠다. 그리고 나무를 본받아야겠다. 뿌리를 내린 만큼 가지를 뻗는 나무와 같이 갈무리할 수 있는 만큼, 또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눈 내리면 쌓이는 대로 휘어지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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