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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복 Dec 31. 2019

자작시로 읽는 에세이(11)-중년

머물 때인가/ 떠날 때인가/ 뒤돌아 선 모습이 초라하지는 않은가//


나이 들면서 수시로 확인한다//


나아갈 수 없다면/ 머물고/ 머무는 자리 집착하거든/ 미련 없이 떠나라//


자신의 한계를 알기에/ 중년은 아름답다//


중년의 삶은/ 절반이 기다림이요/ 절반은 침묵이다//(졸시 <중년> 전문,「묵언」중에서)



세속의 나이 쉰일곱-중년이다. 나이를 먹고, 사회적 지위가 마련되면서 가지는 것도 많아졌다. “가지는 만큼 버리라!”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문제가 되고 보면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만큼 현실에 집착하고 미련이 많은 존재가 있을까?


산보를 하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후일 내가 죽거든 장례식을 치르지 마라." 아내는 나의 제안에 대해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다. 화장을 하고 남은 뼛가루를 뿌리는 것마저 세상을 더럽히는 일, 스치는 바람처럼 허공중에 흩어져 사라져 가리라는 남편의 생각을 아내도 안다. 사별한 이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의지처라도 있어야 한다는 아내의 소박한 바람을 남편인 나도 안다. 그러나 한평생 신명나게 살았으면 그만. 죽은 후에도 장례식이란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거치는 것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세상을 살고, 가정을 이끌고, 또 자식을 키우면서 '침묵'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젊을 때는 이렇게 믿었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그것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 허상이자 오만이었는가.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에 따르고, 맞춰주고, 순응하는 것은 패배자의 삶일까? 매 순간 거세게 부딪히다보면 결국 자신도, 세상도 상처만 남게 되는 것을. 세상에 철저하게 나 자신을 내어주고, 비워냈을 때 오히려 부정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온몸으로 체감하였다. 그런 세상의 이치를 중년의 나는 안다.


중년이 되어 어떤 일을 대할 때 마다 신중하게 생각한다. “나아갈 때인가, 물러설 때인가, 아니면 머물 때인가.” 나아갈 때임에도 머물거나 물러섬은 비겁하다. 머물 때임에도 섣불리 나아가거나 물러섬은 방종이자 패착이다. 물러설 때임에도 머물거나 나아감은 교만이고, 미련이자 욕심이다. 나 자신의 한계를 알고 운신하고 처신하는 지혜가 필요한 나이-중년이다.


돌이켜보니 사십대에서 오십대로 접어드는 때 마음이 가장 헛헛하였다. 육십, 칠십 대의 나이가 되면 어떤 느낌일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은 한 폭의 산수화 같을 것이다. 그 어떤 소설이나 수필 보다 절절한 사연으로 채워진 인생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 설움이 밀려들고,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문득 세상과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져 외로움에 진저리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절로 서럽다.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


중년이 되면, 믿고 신앙하는 종교가 없어도 절로 기도하게 된다. 한겨울,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듯 자비로운 마음으로 헐벗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보듬어 안았으면 좋겠다는 서원으로 기도한다. 이 땅의 자식들은 더 이상 강고한 현실의 장벽에 온 몸을 세차게 부딪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기다리지 않고, 침묵하지 않아도 행복한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중년이 되면, 한 떨기 꽃이 되고 싶어 한다. 꽃향기 나는 품격을 갖추기를 기도한다. 나의 향기로 이 땅의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이 잠시나마 위로받고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말하지 않아도 향기가 나고, 나만 바라보고 있어도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꽃과 같은 품격을 갖춘 중년이 되기를 기도한다. 나를 찾지 않아도 불쑥 나서기보다는 기다리고, 나를 비난하고 욕하여도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오직 나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이 세상이 평화롭기를 기도한다. 기도하는 나이-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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