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울 령 Feb 15. 2022

정치 판타지가 민주주의의 적

예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의 대단한 행적은 대부분 선거 운동할 때, 혹은 퇴임 후 모습에 한정됐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쥔 재임 기간의 행적일 텐데, 이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혹독한 비평은 대부분 그의 재임 기간에 벌어진 일에 대한 것이었다.


얼마 전 한 정치 보좌관이 대나무 숲에 쓴 글을 보았다. 좀 도덕적이진 못하더라도 유능함이 보수의 정체성이었는데, 그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내용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결국 도덕적인 지도자도 정치를 하면 무조건 흠결이 생긴다. 정치란 이익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다 보면 도덕적 기준에 못 미치는 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줄곧 보수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국민이 이러한 정치 현실을 감안하고 정치인을 평가했던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시민은 언제나 현명했다. 하지만 언제나 정치를 망치는 건 정치 주체들이었다. 소위 정치에서 영향력 있는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람들이, 전현직 정치인들이, 기성 미디어가 정치를 비호감이니 뭐니 하며 도덕 대 비도덕의 싸움 구도로 몰아가니, 정치는 현실에서 멀어지는 판타지의 문제로 치닫게 된다.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보자. 나는 중도의 정치 혐오가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리더도 결국 한 인간인데, 모든 가치가 근대화로 환원되던 야만의 시대를 지나온 사람 중에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마 종교 지도자나 봉사 활동자, 도인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지배받고 싶지는 않지 않나? 분명 과거의 도덕과 역량의 기준은 지금과 사뭇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격변의 배경을 고려치 않고, 무조건 현대적 관점에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엄중히 검증하고 재단하려는 모습을 보면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판타지 서사의 주인공 찾기'라는 생각만 든다. 아니면 매번 운이 좋았던 최고의 운빨 소유자나 기성 체제에 불만 없이 수용만 해온 사람을 찾나? 기성 체제에 불만이 없다면 굳이 정치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별의 순간이니 뭐니 하며 정치를 판타지 영웅 소설화해버리니, 정치에 관심 갖는 게 좀 오글거리고 민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특히 현실을 다뤄야 할 정치를 판타지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유권자는 정치인에게 진짜 우리 현실을 다스릴 능력을 요구하고 평가할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또한 정치를 통해 희망을 바라는 일이 판타지와 오버랩되며 민망스러운 마음을 들게 하기도 한다. 희망과 판타지는 다르다. 희망은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동기 부여제이고, 판타지는 현실 문제를 외면하기 위한 초월적 믿음이다. 전자 없이 삶을 사는 건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게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호통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마치 정치인의 덕목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현실 문제를 방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도 보인다. 그래서 겉으로 정치를 혐오하고, 냉소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현실적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판타지적 영웅 소설을 정치에 투영해 메시아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거나, 아니면 정치 혐오 정서를 유발해 정상적인 사람들을 정치에서 소외시키고 비이성적인 군중들을 중심에 위치시켜 특정 정파의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려는 것이거나.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22년 주목해야 할 10개 트렌드 중 첫 번째로 ‘민주주의 대 전제 정치의 대결'을 꼽았다. 전제 정치의 토대는 현실 왜곡, 판타지에 있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나와는 정반대 편에 대한 혐오를 정당한 감정이라고 외치며 처벌 판타지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정치인 역시 전제 정치 지도자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민주주의 정상회의’에서 “독재자들로부터의 외부 압박” 외에 “사회적 분열과 정치적 양극화의 불꽃을 부추기는 목소리들”도 자유를 위협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종주국, 친미일까?


또한 현재 거대 양당뿐만 아니라, 소수 정당 정치인들도 정치 양극화의 불꽃을 부추긴다고 본다. 다당제 개혁에 실패한 후 복원 노력 없이 다당제 정치를 하겠다고 외치고, 가장 실현 가능성이 낮은 진보 정책을 공약하며 거대 양당의 복지 공약 실현 가능성을 따져 물으며 비판하는 건 '정치의 판타지화'에 동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일찍이 판타지를 걷어내고 정치를 냉정하게 바라본 지 오래이다. 문제는 그 주체들이다. 정치권력을 가지고도, 내려놓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니, 우왕좌왕한 정치의 뒷감당은 오롯이 약자와 시민의 몫이다. 온라인 극단주의자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지니가 아닌, 도덕적 판타지에 갇힌 사림 선비가 아닌, 진짜 우리 현실 문제를 직시하고 다뤄줄 정치인은 없는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뉴욕타임스 혁신은 정말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