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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Feb 13. 2022

뉴욕타임스 혁신은 정말일까?

뉴욕타임스의 저널리즘 혁신으로 거론되는 건 크게 3가지이다. 디지털 전환, 구독 서비스 도입, 인력 교체.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전환하겠다는 게, 더 이상 종이 신문을 읽지 않는 시대에 구독 서비스로 전환하겠다는 게, 경영 위기에 구조 조정하겠다는 게 대단한 혁신으로 여겨진다. 물론 각 테마를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좀 혁신적으로 여겨질 부분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기업들이 하는 산업 패러다임 재편을 혁신이라고 보는 건 내가 '혁신'이라는 단어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뉴욕타임스는 자랑스럽게 유료 구독자 증가를 내세운다. 그런데 유료 구독자 증가가 정말 그 대단한 비즈니스 모델 덕분에 이뤄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봐야 한다. 뉴욕타임스 구독자 급증 시기는 크게 2번이었다. 첫 번째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이고(전년 대비 유료 구독자 60% 증가), 두 번째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벌어졌을 때이다. (전년 대비 유료 구독자 30% 증가) 최근 유료 구독자가 1000만 명 달성했다는 기사도 있었지만, 한 미디어 매체를 인수합병하면서 얻은 결과였다. 그렇다면 유료 구독자가 유의미하게 증가한 때의 공통점은 모두 사회에 '공포'가 닥쳤을 때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때 평소 고품질 저널리즘을 추구한다는 마케팅을 대대적으로 해온 뉴욕타임스로 불안한 심리가 옮긴 것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이러한 경험들은 전 세계 언론사에게 어떤 교훈을 남길까?


교훈보다 더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결과일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는 '민주적 사회'를 위함일 테다. 하지만 뉴욕타임스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최고의 저널리즘은 유료 구독자 증가에는 효과적이었다고 해도 그들이 다루는 사회에서는 큰 영향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국은 민주적 합의에 상당한 곤혹을 치를 뿐만 아니라 사실과 거짓이 혼동돼 큰 사회적 갈등 비용을 치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BBC, 로이터 등 유수의 저널리즘을 자랑하는 언론사가 있는 영국 역시 코로나 팬데믹 국면에 5G 기지국 파괴 사태가 벌어지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포기한 듯 방역 조치를 완화하는 모습에서 지식 정보의 숙의 없는 정치를 목격할 수 있다.


저널리즘 품질은 최고인데,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시민들의 시민 의식이 형편없거나, 품질이 사실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거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혹은 믿고 싶은 발상은 전자이다. 그리고 믿는대로 행동한다면, 진실이 아닌 믿음도 진실이 될 수 있다. 가령 최근 미국 주요 도시 정치인들은 방역 전문가들의 합의를 무시하고 방역 조치 완화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데이터는 60% 이상의 대다수 시민들은 열심히 백신을 맞고 거리두기를 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민주주의에서 합의에 이를 수 없다면 최후의 결정 수단은 다수결이다. 그런데 정치는 과학적 의사결정을 믿는 다수의 시민이 아닌, 소수의 비합리성에 휩싸인 귀닫은 극단주의자들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해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의 무능 탓일까? 아니면 저널리즘의 의도된 방관 탓일까? 아니면 둘의 합작품일까? 캐나다 출신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레인은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는 일부러 재앙을 자초해 이데올로기 내지 경제 개혁을 단행해 큰 돈을 벌어왔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현상을 '쇼크 독트린'이라고 명명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대표적이다. 뉴욕타임스의 구독자 증가 사례에서도 살펴봤듯이, 잘못된 정치로 인해 사회의 불안정성이 커지는 건 언론에 그다지 불리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언론이 다시 정치에 호통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지사적 위치를 회복하고, 이로써 그동안 무너졌던 신뢰를 다시 쌓아 유료 구독 등 디지털 전환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실제로 언론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인 현상만을 다루며 사회 정치적 위기감을 조성한다. 문제 원인은 모두 정파적인 정치인 혹은 유튜브의 알고리즘과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는 무지한 개인 탓이라는 식으로 돌린다. 그런데 똑같이 정파적이고 미디어 매체인 언론 역시 이러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인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극단적 사람들의 의견을 정치적 의사 결정에 반영해 실제 문제 해결을 외면, 지연, 혹은 악화시킨다. 그리고 문제가 악화되면 결국 시민이 틀렸다며, 원인을 개인 탓으로 돌리고, 민주적 가치를 과거로 퇴행시키는 의사 결정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때가 비로소 쇼크 독트린의 목적인, 이데올로기 내지 경제 개혁이 단행된다. 쇼크 독트린 생성의 '파이프라인'이 그려진다.


결국 뉴욕타임스의 혁신은 '쇼크 독트린' 패턴을 저널리즘 산업이 주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얻은 성공은 뉴욕타임스의 장기적 생존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회의적이다.


현재 한국 대선을 중계하는 언론 보도도 전체 결로 보자면, 쇼크 독트린의 파이프라인을 그리려고 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네거티브를 비판하면서 양측 진영의 네거티브를 대신 보도해주며 정치 혐오 확대에 일조한다. 사실 보도가 아닌 전문가(?)들의 예측 보도량을 늘리고, 이번 대선에선 출구조사 정확도를 높이겠다고 자신하며 언론사 스스로 정치 컨설팅 사업을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유력 정치인들이 여기에 노골적으로 동조 내지 휘둘린다. 그래서 나는 이번 대선을 보며 쇼크 독트린의 파이프라인에 따른 결과, '그레이 스완'을 느낀다. 뻔히 악재가 예상되지만, 해결책이 없다. 정치인들이 모두 언론 보도에 나오는 극단주의자 의견에 휘둘린다면, 상식적인 시민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으니까.


아직 시간은 남았다고 긍정하며 마른 수건 쥐어짜듯 떠오른 대안은 하나, 정치인의 탈동조화 아닐까? 정치인이 언론이 보도하는 극단적 사례가 아닌, 일반 시민의 희망과 열망을 믿는 것이다. '쇼크 독트린'에 관한 서평을 읽던 중, '대안 제시가 부족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문제 원인에 대해 고민해보면 쇼크 독트린을 일으키는 트리거는 결국 우왕좌왕하는 재난의 불안에서 피어오르는 극단주의자의 그림자를 따르려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만약 쇼크 독트린에 이용 당하지 않으려는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정치인들이 극단주의자가 아닌 다수의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현재 대부분의 유권자는 2016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 때와 정치적 니즈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 당시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특정 정치인의 팬덤이 아니었고, 검찰이나 언론을 탓하려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이전 체제에선 미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쟤보단 내가 낫다'는 식의 네거티브에선 미래를 볼 수 없다. 근거 없이 누군가의 증언에만 의지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정치 세력에게선 미래를 볼 수 없다. 시위할 때처럼 몽둥이 매질에 견디기 위해 동지의 팔짱을 꽉 쥐듯이 내편을 감싸는 정치에서는 미래를 볼 수 없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지도자에게서는 미래를 볼 수 없다.


희망은 단순한 데서 나온다. 과거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 같은 정치, 기성 권력의 저항에 차분히 대응하는 정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리는 정치에서 희망이 느껴진다. 단단하게 희망을 지키려는 모습은 지도자의 권위가 될 수 있다. 희망을 권위로 내세우는 리더는 공포를 권위로 세우는 리더를 압도한다. 시장주의와 민주주의 질서의 교집합에는 (실제로 어떻든) 항상 '희망'을 외치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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