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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Mar 21. 2023

봄은 쉽게 온 적 없었다

아버지와 내 생일에 찾은 아버지의 산소

 30대가 된 후에는 '생일'이라는 것에 별 감흥이 없었다. 적어도 올해 전까지는 그랬다. 3월 4일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날은 음력 2월 13일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아버지의 생신이기도 했다. 때로는 현실이 더 영화 같을 때도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버지와 생일이 겹쳤던 해가 몇 번 있었다. 평소 생일을 챙기지 않는 것처럼 숫자를 잘 헤아리지 않으니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지난해 아버지가 코로나19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올해는 같은 날 아침에 가족들이 미역국을 먹으며 아버지와 내 생일을 기념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의 "생일 축하한다"는 말에 쑥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아들 생일날이 아빠 생일이네." 어머니는 몇 주 전에 문뜩 내 생일이 아버지의 생일이라고 넌지시 알려주셨다. 바쁘게만 지내던 중 어머니 말을 듣고 그제야 알게 됐다. 무심한 아들이 아버지 생일을 깜빡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산소까지는 너무 머니까 4월 아빠 기일 때 산소에 갈까?"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아버지의 생일도 챙기고 싶으신 마음이 보였다. 나는 흔쾌히 그날 산소에 가자고 말했다.


 당일 이른 아침이 되고 눈을 뜨자 어머니와 동생은 벌써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언제 끓이셨는지 어머니는 미역국까지 해놓으셨다. 가는 길이 짧지 않기에 미역국은 저녁때 먹기로 했다. 부랴부랴 씻은 후 세 가족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운전대를 잡고 산소가 있는 충남 서산으로 목적지를 찍었다. 2시간 30분은 부지런히 가야 했다. 


 '봄이 쉽게 온 적이 있던 가요…추운 겨울을 지나 온 따스한 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적막한 분위기를 풀 겸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진행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문밖을 나올 때 날씨가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어느덧 봄이 와있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던 그 계절이었다. 그 사이에 봄바람은 아무렇지도 않게도 가족 곁에 불고 있었다. 라디오 진행자의 말대로 봄이 쉽게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산소를 찾는 건 아버지 49재 이후 처음이었다. 지난해 추석 때에 벌초를 가지 않았다. 산소는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조상들을 모신 가족묘인데 먼 친척들의 위로를 듣기가 싫어 산소를 찾는 건 뒤로 미뤄놨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들었던 수많은 위로의 말이 되레 서글프다는 걸 알았던 탓이다. 아버지와 급작스럽게 이별한 가족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줄 알았는데 막상 산소에 도착하니 견딜만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발인 모습은 어제 일처럼 기억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에 큰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큰아버지의 발인 날에 산소에 절을 하며 "이제 편히 쉬세요. 나중에 만나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렇게나 빨리 형을 만나게 될 줄은 알았을까. 아버지도, 가족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인생은 참 덧없기도 하다.' 차에서 내려 산소를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큰아버지댁 가족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그 바람에 내가 초등학생 2, 3학년 된 이후로는 집안에서는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 그렇게 명절마다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가 줄었다. 제사를 지낸 적이 없으니 아버지 산소 앞에 준비한 음식을 어떻게 놓을지 몰라 고민했다. 가까스로 음식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이제는 넷이 아닌 셋이 된 가족이 먼저 떠난 가족을 향해 절을 올렸다. 무릎을 꿇고 포개 놓은 손에 얼굴을 파묻자 눈물이 차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 한잔 마시면서 같이 얘기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그동안 꾹 눌러왔던 아버지의 빈자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손등에 맞닿은 머리를 일으키기 어려웠다. 큰아버지 산소를 향해 절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렸다. 지금의 내 모습과 같았다. 누군가는 설레하는 봄까지 오기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나누어 매우려고 분투했다. 


 절을 다 하고 돗자리에 가족들은 앉아 산소를 앞에 있는 저수지를 바라봤다. "묫자리는 정말 잘해놨네." 어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잠자리를 살폈다. 해가 비치자 이른 봄의 냄새가 났다. 지난해 3월 중순쯤에 아버지가 코로나19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던 날씨다. 봄의 따뜻함이 서글펐다. 누군가는 두 팔 벌려 반가워하는 봄이 누군가에는 상처의 봄이기도 하다. 


 아버지 생전에는 '가족묘가 꼭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할아버지 대의 터전은 충남 쪽이었지만 손자대에서는 서울, 수도권에서 지내는 가족들도 많았다. 산소를 찾기 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해도 빠지지 않고 벌초를 가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산소가 너무 멀다'고 툴툴거렸다. 아버지가 잃게 된 후에야 아버지가 매년 산소를 가신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버지도 자신의 아버지, 나에게는 할아버지를 항상 그리워했던 것이다.


 산소 비석 앞 면에는 납골함을 모신 가족들의 성함이 적혀 있었다. 비석 뒷면에는 항렬에 따라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밑 줄에는 내 이름도 있었다. '결국 나도 여기에 묻히겠구나.' 살면서 처음으로 내게도 평생 쉴 공간이 있음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생겼다. 아버지도 성묘를 와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은 하신 건 아닐까. 멀리 있을 것만 같은 죽음도 꽤 가깝게 느껴졌다.


 세 가족들은 산소를 바라보며 제삿상에 올렸던 사과와 전을 나눠 먹었다. 비록 미역국은 없었지만 이렇게나마 함께 생일 식사를 한 셈이었다. 대강 배를 채운 후 햇살이 비치는 저수지를 바라봤다. 어머니 말처럼 조용하고 볕도 잘 닿는 곳이었다. "우리 가요. 다음에 또 봐요." 어머니가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 가족은 두 남자의 짧은 생일 상을 마쳤다. '봄이 쉽게 온 적이 있던 가요.' 여태껏 들었던 라디오 진행자의 멘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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