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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May 04. 2023

난 엄마의 젊음을 먹고 자랐다

이젠 엄마를 목마 태울 수 있도록

 

'엄마는 왜 이런 것도 몰라.'


 사무실에서 일하는 하던 중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엄마'. 발신자 이름을 보니 어머니의 전화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 때문인가.' 은연중에 귀찮은 마음이 든 채 수신 버튼을 눌렀다.


 "아들, 호프집에서 인테리어용 사진을 보내줬는데 용량이 적어서 출력이 어렵네. 비슷한 사진 좀 구해줄 수 있니?"

 "응. 알겠어요. 카톡으로 사진 보내주세요."


 전화를 끊은 후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 한 장이 카톡으로 도착했다. 외국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사진이었다. 술집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출력하는 사진 같았다. 어딘지 익숙해 보이는 구도였다. 유심히 보니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였다. 앞에 있던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긴 후 검색창에 '옥토버페스트'라는 단어를 쳤다. 블로그 사진뿐만 아니라 무료로 제공되는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사진인데 이런 것도 몰라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한국은 IMF 금융위기를 맞았다.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저축은행인 신용금고에 다니셨는데 당시 금융위기 여파로 명예퇴직을 신청하신 후 회사에서 나오셨다. 출근하는 직장이 없어진 뒤로 아버지는 몇 달 동안 낮시간을 집안에서 보내셨다. 그 후 수유역 근처에 있는 작은 간판 가게를 열었다.


 어머니는 결혼한 후 20대 시절부터 지겹게도 부업을 하셨다. 어릴 적 청계천 동네에 살 때는 아버지가 퇴근 후에 원단을 재단하시고, 어머니는 미싱으로 박음질을 해서 청사초롱을 만들었다.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박음질한 청사초롱을 다시 원래대로 뒤집는 일을 돕기도 했다. 이 외에도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던 틈틈이  봉투를 모양대로 붙이거나 옆집 아주머니들과 인형 눈을 붙이셨다.

 

 아버지는 지난해 4월 갑작스럽게 코로나19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간판일을 하신 지도 벌써 25년이 되어가는 때였다. 어렵사리 간판일을 해오시다가 어머니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됐다. 둘이 하던 일을 홀로 하기도 벅찰 텐데 코로나19 시기에 생활비 명목으로 받았던 대출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도 더욱 쉴 틈이 없었다.


 "엄마, 이미지 찾아서 웹하드에 올려놨어요."

 "응. 그래. 고생했다."


 옥토페스트 홈페이지에서 찾은 이미지들을 웹하드에 업로드한 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은 일을 돕더라도 어머니는 언제나 "고맙다"고 말하셨다. 넉넉하지 않지만 남매가 모나지 않게 자란 건 부모님의 배려 속에서 컸던 영향이 크다. 두 분 모두 작은 것도 베풀 줄 아셨고, 감사해할 줄 아셨다.


 며칠 후에 다시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걱정보다는 불편한 마음이 앞섰다.


 "엄마가 계단에서 떨어졌는데 계속 허리가 아프네. 가게에 올 때 약 좀 사다 줄래?"

 "아니. 왜 계단에서 떨어져?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응. 괜찮은데 허리가 계속 아프네."


 근처 약국에 들러서 붙이고, 먹는 약을 사서 가게로 향했다. 그곳에는 힘겹게 앉아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같은 장소지만 낯선 풍경이었다. "괜찮다"고 연신 말하는 어머니의 허리에 파스를 붙이면서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물었다.


 "계단을 짚으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그냥 떨어졌어.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싱크대에 머리를 박았는데 나무 부분이어서 다행이네."


 코로나19 격리 기간이 끝나고 곧바로 일을 해서였는지 힘이 부쳤던 어머니가 가게 다락방에 올라가서 쉬려고 하다가 계단에서 떨어지신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떨어진 후 2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내게 전화를 걸었다. 

 

 머리를 찧었다는 말에 어머니의 뒷머리를 만지자 혹이 불어나있었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다쳐 겨우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혹을 매만지면서 조금이라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그 순간에도 그렇게 조심했다.


 "안 되겠다. 빨리 병원부터 가봐요."

 "병원은 무슨…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차 시동 켤 때니까 병원 가요."

 "어유. 얘는 왜 이래. 정말 괜찮다니까."


 어머니는 신경질적으로 병원 치료를 반대하셨다. 결국 실랑이 끝에 조금 더 상태를 지켜보다가 병원을 가기로 했다. 이후 급한 대로 냉장고 냉동고에서 꺼낸 얼음에 수건을 덧대어 얼음찜질을 해드렸다.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 얼음찜질을 했다. 


 어머니의 지친 얼굴에는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박혀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부쩍 더 나이가 드신 모습에 잠시 낯설어 보이기까지 했다. '엄마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나 또한 이제는 부모의 품에서 자랄 나이가 부쩍 지났다는 걸 그때가 돼서야 깨달았다.


 집에 돌아온 후로 어머니는 기진맥진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는 코로나19 후유증으로 계속 장염을 앓고 있었다. 장염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낙상 사고를 당하신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내가 가족을 더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던 것 같다. 의무감으로 시작된 마음이 점차 부담으로 변해왔다. 부담은 다시금 조급한 마음으로 바뀌면서 가족들을 챙길 여유없이 하루를 바삐 산 것 같다.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어머니도 다치지 않으셨을 텐데….' 후회는 언제나처럼 일이 벌어진 후에야 찾아왔다.


 그날 저녁 때마침 대학생 때 하던 싸이월드 사진첩을 들어가 봤다. 어릴 적 사진을 모아둔 폴더에는 어머니 목에 올라타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길을 멈추고 한동안 계속 바라봤다. '결국 나는 엄마의 젊음을 먹고 자라왔구나.' 사진 속 엄마와 아들의 모습을 웃으며 찍고 있었을 아버지의 모습도 눈물 나게 그리웠다.


  엄마의 목마를 타고 있던 사진을 스마트폰 배경화면으로 해놨다. 부모님이 나를 키웠듯이 이제는 어머니가 내 목마를 타며 의지할 수 있고, 엄마의 젊음을 먹고 자란 걸 잊지 않도록 하게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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