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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Sep 14. 2023

틈은 흠일까

내 안의 작은 방문을 열어두고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나는 원래 틈이 많은 사람이었다. 손해를 보는 것을 알면서도 남에게 양보할 때가 있었고, 막상 그 손해가 확정될 때는 혼자 앓기만 했다. 그래도 목소리를 높여서, 손해를 콕 짚으며 따지기보다는 '그냥 그런 가보다'라고 했다. 겉으로는 대인배인 척 했지만 홀로 힘들었던 적도 많았다.


 올해 꼬박 사회생활 10년이 됐다. 첫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그 습성은 버리지 못했다. 업무를 새롭게 분장하는 회의 시간에서 선배들이 추가되는 일을 맡기 꺼려할 때면 먼저 손을 들었다. 꼭 그 일을 하고 싶어서라기보단 서로 일을 미루려고 하는 적막을 참지 못했다. 그 덕분에 일을 조금이나마 덜은 선배나 동기들은 "고맙다"라고 인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넘어갔다.


 굳이 따지자면 손해를 보는 일이 잦아지면서 피로가 쌓을 때도 있었다. '그냥 조용히 좀 있을 걸'이라든가 '더 얼굴 두껍게 있을걸'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내 안의 '틈'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흠'으로 보이는 것 아닌가 싶었다.


 자영업자로 살고 있는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주말에 운영 중인 무인카페 손님이 핸드폰으로 연락이 온 적이 있었는데, 음료를 모두 뽑은 후 나오는 뜨거운 세척물에 손이 데었다는 불만이었다. 최근 무인카페 기기에서는 그 과정마다 안내 방송이 나온다. 물론 세척할 때도 '뜨거우니 조심하세요'라는 자막과 방송으로 안내된다. 처음에는 손님의 부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다른 다친 부분은 없으시냐" "죄송하다"라고 연신 사과했다. 그제야 조금 화가 풀린 듯이 손님은 "혹시 나중에 손 치료받을 수도 있어서 연락드렸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제품이 잘 나갈 때는 실수로 제품과 주소가 적힌 송장을 바꿔서 붙인 적이 있었다. 제품을 보내고 하루가 지난 후 고객 분의 전화가 왔다. "아니. 어떻게 다른 분 제품이 올 수가 있죠? 기분 나쁘네요"라는 말이 다짜고짜 쏟아졌다. 내 실수로 배달이 잘 못된 줄로만 알고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택배사사에서 잘못 배송한 것이었다. 억울했지만 어떻게 하랴. 그저 하나의 고객 응대가 잘 끝난 것으로 마음을 쓸어내렸다.


 지인들은 이런 얘기를 들을 때 "따질 건 따져야 하지 않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도 무작정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따질 때도 있다. 단 앞선 일련의 과정에서 상대가 잘못을 했을 때, 그리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상황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다. 살아오면서 나만의 '틈'을 메우기 위해 어느 정도 '선'이 정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틈은 과연 흠일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동안 겪었던 유쾌하지 않은 기분들은 극히 일부였다. 회사에서 손해를 일일이 따지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그보다 급여나 환경이 더 나은 회사에서 오퍼가 왔다. 그 덕분에 두 번 이직하게 됐다. 새로운 회사에 갈 때마다 상사들은 첫 회사에서 했던 업무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본래 게으름이 많은 성격이지만 직장에서 만난 분들은 내 성실함을 높게 평가했다. 사회생활 초반에 업무량이 만만치 않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짧은 시간에 실력도 많이 늘었던 것은 덤이다.


 무인카페나 온라인 사업을 하면서 느꼈던 점 중 하나는 '안티는 팬이 된다'였다. 무인카페에서 손이 데었다고 연락온 분은 나중에 아내 분과 같이 매장을 찾았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커피나 음료를 뽑아 드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못을 따지기 위해 연락을 했다기보단 '순간의 기분 나쁜 경험을 풀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고객 경험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된다.


 택배를 잘못 받은 고객은 일주일이 지난 후 사이트에 좋은 평가의 글을 써줬다. '물건이 잘못 와서 당황했는데, 빨리 잘 처리해 주셨네요"라는 평가였다. 당시 자세한 상황은 적혀있지 않았으나 판매자의 대응에 좋은 평가를 준 것이다. 그분도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택배사의 실수를 알고 판매자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한다. 


 정상적인 기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예도 당연히 존재한다. 사회 초년생 때는 그럴 때면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였는지 되도록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가려고 한다. 지혜라기보다는 그동안 사회생활에 대한 나만의 데이터가 쌓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도 타인을 위한 틈은 항상 열어두려고 한다. 틈이 흠이 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그보단 틈이 서로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작은 공간이 된다고 생각해서다.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타인의 흠들을 자신의 틈 속에 넣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 또한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내 안의 문을 꽁꽁 걸어 잠가봤자 세상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안에 있는 문에 자그마한 틈이라도 열어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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