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힘> (칩 히스, 댄 히스)
# 겉멋만 든 문제아
중학교 때에 나는 소위 말하는 ‘헛똑똑이’ 였다.
물론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 바 있겠냐만은 다시 봐도 그 때의 나는 정말로 교만했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얕은 지식을 설파하며 친구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주목과 관심을 끝없이 얻기 위해 주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행학습으로 얻은 점수를 ‘기술’ 이 아닌 ‘실력’ 의 성과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는 왜곡된 선민의식까지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더욱 무서웠던 점은 그런 내 모습이 100% 옳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 그 순간, 나는 무너졌다
중학교 2년 내내 많은 선생님들과 학생을 거쳐갔지만 나의 오만함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저 어린 아이의 치기라 생각한건지, 바꿀 수 없는 천성일거라 생각한 건진 모르겠지만 나의 이런 허물들에
대해 그 누구도 지적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칭찬하거나 부러워하는 친구들까지 생겼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상관없이 그들에게 나는 ‘자신감있고 활발하고 공부까지 잘하는 우등생’ 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갖고 있던 생각이 점점 고착화되어 완전히 굳어버릴 즈음, 그 순간이 찾아왔다.
한창 우리 중학교에서는 직전 학기 성적을 기준으로 그룹을 나누어 영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그 때 만난 선생님이 여간 예사롭지 않은 분이셨다.
동그란 두상에 짧은 머리를 가지신 그 젊은 여선생님은 쾌활한 인사로 첫 수업을 시작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신만큼 학생들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수업에 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선생님의
진가는 차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암기가 아닌 이해로 접근하는 교수법, 이론이 아닌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정보, 실력을 키우는
특별한 프로그램은 많은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또한, 영어외 적으로도 효과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준 첫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중간고사가 끝났다. 그 선생님은 학생들이 해온 과제와 점수를 바탕으로
개인 면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개인 면담은 중학교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처참하고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현석아, 선생님이 보기에 너는 너무 겉멋이 든 것 같아.” 라는 말로 면담은 시작되었다.
나의 모든 결점들이 낱낱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던 비판과 지적이 끝없이 이어졌다.
면담 내내 참다참다 눈물이 터지기도 하였다. 서러웠다.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 사실인 걸.
그렇게 한참을 울었을까. 선생님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 마디 말을 건넸다.
“현석아, 이제 학생다운 학생이 되자. 그리고, 공부다운 공부를 하자.”
그렇게 내 인생은 한 차례 바뀌었다.
# 순간을 기다리지 말고, 누군가의 순간이 되자.
미국의 유명한 경영학 전문가이자 조직행동론의 구루인 히스 형제 (칩 히스, 댄 히스) 는
극적인 변화를 불러올 정도로 강력하지만 여전히 평가절하되고 있는 짧은 순간이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저서 <순간의 힘> 을 통해 재조명한다.
총 11개의 챕터를 통해서 극적인 변화의 순간에 내포된 4가지 요소 (고양, 통찰, 긍지, 교감) 를 낱낱이
분해했다. 또한 다양한 사례로 검증된 방법들을 제시함으로써 순전히 운에 기대지 않아도 얼마든지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극적인 순간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스스로뿐만이 아니라 그 순간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
“선수 서명의 날” 이라는 극적인 순간을 재창조해 “졸업생 서명의 날” 로 수많은 학생들에게
최고의 순간을 안겨준 ‘YES 대안학교’,
진실에 걸려 넘어지게 해 수 년 간 바뀌지 않았던 한 부족의 위생 관념을 한 순간에 바꾸어버린
‘CLTS 프로그램’,
그리고 합창단에 어울리지 않던 문제아를 말 몇 마디로 최고의 가수로 탈바꿈시킨 ‘키라 슬룹’ 의 음악 선생님,
그리고 끝없는 질문을 통해 내 스스로가 매우 잘못되고 있음을, 그렇기 때문에 바꿔야 함을 깨닫게 해준
나의 영어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다른 명저가 생각났다.
바로 최인철 교수의 <프레임> 이다.
저자는 지금까지도 <프레임> 을 계속 고치고 고쳐 개정판을 내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그 결과가 변하는
심리학과 사회과학의 특성상 틀리다고 생각했던 연구가 맞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고 그 반대도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수정 활동을 단순히 틀린 근거를 제거하고 맞춤법을 고치는 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는 서문을 고쳐 책 속 여러 챕터 중 많은 사람들이 주의깊게 봤으면 하는 내용을 매번 바꾸는데,
이번 개정판에서 그가 강조한 챕터 중 하나는 바로 6번째 챕터인 “’내가 상황이다’ 의 프레임” 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영향력과 그들이 만드는 상황에 신경을 쓴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에 영감을 받거나 행동을 바꾸는 긍정적 영향도 있지만, 상대방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던가 행동 하나 하나에 눈치를 보는 부정적 영향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중대한 요소가 하나 있다.
나 자신의 행동과 생각 또한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이 ‘불편한 진실’ 을 알아버리는 순간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나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주위 사람들의 기분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
내가 행한 행동 하나가 주위의 행동과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내가 만든 상황이 그 사람들의 상황에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들을 창조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는 종종 긴급한 문제나 외부의 압력에
좌절되기 십상이다.
무언가를 바꾸어보려고 해도 ‘적당히’ 가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우리는 좌절한다.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누군가가 해주겠지’ 라는 생각에 흐지부지 넘어간다.
상대방을 바꿀 수 있는 순간을 설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도 힘들고 번거롭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기약없이 언제 있을지 모를 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 이 순간을 어떻게 해야 ‘상대방’ 을 고양시킬 수 있을까? “
“ 어떻게 ‘상대방’ 에게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까? “
“ 어떻게 ‘상대방’ 의 교감을 솟구치게 할 수 있을까? “
‘약간의 관심과 노력’ 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답을 실천하기 위해 한 발자국씩 나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 내 인생의 물길을 바꾸었던 그 때의 영어 선생님처럼
우리들 또한 누군가의 순간을, 더 나아가 전체를 바꿀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