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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Apr 11. 2024

시간의 빚

일상기록

오래 전, 유시민 작가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작가는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시민 혹은 국민이 그 제도를 체화하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며,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민주주의가 급격하게 도입되었으나 그마저도 군부 독재 시절을 거치며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기에 지금에 와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잡기 위한 홍역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즉, 작금의 정치, 사회적 혼란은 서구의 많은 민주국가들이 제도를 안착시키는 과정에서 꽤 오래 겪어 온 정치적 혼란과 희생을 우리나라 민주주의 도입 후에야 후불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작가의 탁월한 식견과 분석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꼭 유시민 작가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살면서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 참 많다. 대표적으로는 공부(특히 시험공부)가 그렇다. 물론 가끔 공부나 시험 준비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남들이 2~3년씩 걸리는 공부를 1년 이내에 해치워 버리는 별종들의 이야기도 있기는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하루에 10시간 이상 공부하는 생활을 적어도 1년 이상은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아마 엉덩이 싸움이라고 했던가.


비단 공부뿐만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렇다. 건명이를 낳아 키우기 전, 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내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더라도(사실 별다른 일을 안한 건 아니다. 나는 열 달 동안 아이를 뱃속에 넣어 기르다가 내 살을 찢어 태어나게 하지 않았나), 나는 엄마니까 아이가 나를 보면 반겨주고 방긋방긋 웃어줄 거라는 환상이었다. 그러나 건명이를 키우면서 그 환상은 정말 얼마 가지 않아 박살이 나고 말았다. 임신 열 달 동안 내가 먹는 것 다 나눠먹고, 심심하면 수시로 내 갈빗대를 뻥뻥 차던 녀석이었건만 막상 낳고 나니 녀석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작고 빨간 녀석과 처음부터 다시 친해져야 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인 시간이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먹고 자고 씻는 등의 기본적인 일들마저 뒤로 미뤄둔 채 내 24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녀석과 나누었다. 그러기를 몇 달 하고 나서야 녀석은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웃어 보였고, 나는 아이의 미소와 나를 향한 옹알이, 애착 형성(좋게 말해 애착이지 사실상 껌딱지 놀이) 등이 철저히 내가 아이에게 투입하는 시간과 관심, 애정에 비례해서 증가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모든 부모가 다 아이에게 시간과 애정을 충분히 쏟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향이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생업으로 인해 시간이 허락하지 못하는 경우, 혹은 애정을 충분히 쏟았음에도 아이가 엇나가는 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예전에 직장에서 어떤 직원과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직원은 직장 업무도 바빴고 또 승진 등의 이슈 때문에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쏟지는 못하고 살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다 아이가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그는 경찰에서 연락을 받았다. 아이가 오토바이를 훔쳐서 잡혀왔다는 거였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안 그는 뒤늦게 직장에 휴직원을 내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하였으나, 이미 아이의 마음의 문은 닫힌 상태였고 부모의 때늦은 관심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부모가 바쁜 아이들 모두가 이런 비행을 저지르지는 않겠으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의 경우 어릴 때부터 부모가 좀 더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면 '오토바이 절도'라는 사건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주말, 우리 집에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불교 박람회'를 구경하려고 남편과 강남 쪽에 외출하였는데 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집 근처 음식점에서 혼자 안주에 막걸리를 드시고 있으니 같이 먹자는 거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강남에 나와 있는 상태라 바로 갈 수가 없어서 엄마더러 이번주는 시간이 안 맞았으니 다음 주 주말에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하고, 과음하지 말고 들어가시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경찰이었다. 그리고 이어 119 구급대원의 전화가 왔다. 엄마가 술을 드시고 정신을 잃어 누군가 신고를 모양이었다. 엄마를 응급실로 이송하기 위해 구급차가 있었고 나는 정신없이 뛰어갔으나 구급차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엄마는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주변에 사람이 접근도 못 할 정도로 괴성을 지르며 팔다리를 심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당연히 대화는 전혀 되지 않았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구급차 안에는 엄마의 끊임없는 괴성과, 그런 엄마를 진정시켜 보려는 구급대원의 헛된 목소리만이 반복되었다. 구급대원은 이대로라면 어느 병원에서도 엄마를 받아주지 않는다며 나더러 어쩔 거냐고 하였고, 곧이어 엄마가 이렇게 팔다리를 휘두르다가 자기가 맞아 다치기라도 하면 자기는 소송을 걸 거라고(아마 농담이었겠지만) 말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심하게 움직이는 다리를 피해 가며 구급대원의 질문(엄마의 이름, 주민번호, 연락처, 주소, 과거 병력 따위)에 상세히 답해야 했다. 괴성을 지르는 엄마 목소리가 엄마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질문들에 답하는 내 목소리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구급대원이 엄마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응급실에서도 엄마의 괴성과 몸부림은 그치지 않았고 거기에 욕설까지 더해졌다. 간호사는 나더러 어떻게 할 거냐며 판단을 재촉했다. 구급대원도 간호사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기억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하여 나는 엄마를 검사해 달라고 하였고, 곧 엄마는 응급실 내 작은 방으로 옮겨졌다. 신속한 손길들이 엄마에게 환자복을 갈아 입히고 링거를 꽂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엄마가 몸부림이 심해 낙상의 위험이 크니 절대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구급대원들도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구급대원 중 한 명은 나에게 몇 번이나 "엄마가 이러는 게 전에도 있던 일인가요?"라고 물었다. 어쩌면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지나치게 침착해 보여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당연히 알 수 없었으나 모든 이들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결정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사람과 침착하게 사태 파악을 하고 이것저것 결정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는 없는데 또 같은 사람이기도 해야 했다.


엄마의 괴성과 욕설, 몸부림은 엄마가 조금 정신을 차리고 퇴원하자고 닦달하여 퇴원하기까지 3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응급실에는 환자 외에 보호자 1명만 들어갈 수 있어서 나는 그 시간동안 그 모든 것을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했다. 엄마는 여기가 어디냐고, 지금 몇시냐고 묻고 또 묻다가 욕을 하다가 소리를 지르다가 울었다. 엄마와 나는 동시에 같은, 하지만 또 다른 지옥 속에 있었다.


끔찍하게 길었던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엄마는 당연하게도 그 일들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남편과 언니를 통해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나에게 하루종일 카톡도 보내지 못할 만큼 의기소침해 있었다. 나는 출근해서도 좀체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도저히 사람들과 어울려 억지 웃음을 지으며 식사를 할 수 없어서 연이틀 점심에 약속이 있다고 하고 나와 커피 한 잔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구석에서 상처를 핥는 짐승마냥 숨어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엄마의 괴성과 몸부림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안그래도 건명이가 고2 들어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학교에서 조퇴하거나 아예 결석을 하는 일이 자주 생겨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인데 엄마까지 이러니 나는 더이상 감당할 수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여 누가 나에게 "그래, 감당 못하겠으면 다 내려놓아"라고 해줄리도 없었다. 내 어깨에 놓인 짐은 여전히 그 무게를 자랑하며 건재했다. 엄마로부터 카톡이 와도 반갑지 않을 것 같았지만, 본인이 저지른 '사고'로 기가 죽어 하루종일 아무 말도 못 하는 엄마 모습을 보는 것도 편치 않았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몸보신 하자며 선거일에 맛난 거 먹으러 가자고, 그리고 쇼핑하자고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러고 나니 문득 꽤 오래 전, 다리를 버둥거리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민근이였다.


둘째 민근이는 세상 둘째 가라면 서러울 순둥이였는데, 그런 녀석도 다리를 버둥거리고 뻗대며 운 적이 있었다. 코감기에 심하게 걸려 코가 몹시 막혔을 때였다. 코를 빨아내도 그때 뿐, 코막힘이 금방 다시 생겨서 답답하고 힘든 민근이는 내 앞에 앉아 다리를 버둥버둥하며 울고 보챘다. 힘이 들 때,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울 때에는 누구라도 믿을만한 누군가에게 팔다리를 버둥대며 울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비록 나이가 들었더라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엄마가 그랬던 지난 일요일 저녁, 엄마 옆에서 꼼짝없이 보내야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엄마와 시간이 맞지 않아 엄마를 혼자 술 마시게 했던 시간은 결국 빚이 되어 그런 식으로 갚게 된 거였다. 아마 나와 남편이 그날 강남에 가지 않아 엄마와 함께 술을 마셨다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나는 1월부터 남편과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고,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주말 뿐이어서 주말에 둘이 시간 보내는 것도 못하느냐고 항변 아닌 항변을 하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고라는 게 어디 그런 사정을 봐주는 것이었던가. 공부를 하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부모를 모시는 것도 절대적인 시간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 당시에 꼭 필요한 시간을 쓰지 않으면 '시간의 빚'은 몇 배가 되어 나를 덮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그날 엄마가 크게 다치지 않고 그 정도로 상황이 마무리된 건 정말 천행이었다.


여전히 내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그래야 할지는 알 수 없으며 내 시간을 여기 쓰고 저기 나눠주다 보면 남아있는 몫은 간신히 숨만 쉴 정도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온전히 혼자 있게 되겠지. 그때를 대비해서 나를 수습해 줄 사람에게 미리 부탁해야겠다. 내가 한 줌 재가 되어 잘 식은 채 작은 항아리에 담기게 된다면, 나를 납골당 맨 아래나 맨 위 구석진 자리에 놓아 달라고.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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