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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May 02. 2024

할머니의 여행

일상기록

어제는 밍기가 학교에서 백일장 행사가 있어 어린이대공원에 간 날이었다. 밍기는 꽤 오래 전부터 백일장을 기다렸다. 백일장에서는 할머니를 주제로 글을 쓸거라고 했다.


퇴근 후 밍기와 저녁을 먹으며 백일장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재밌었다며, 운문과 산문을 각각 한 편씩 써서 냈다고 했다. 그런데 글 주제는 할머니나 가족이 아니고 '여행'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래서 녀석이 가족여행 경험을 토대로 글을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녀석의 생각은 달랐다.


밍기는 '할머니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그건 할머니가 물리적으로 어디를 간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엄마는 나이가 드실수록 예전 이야기(주로 안좋거나 아픈 기억들이 대다수지만)를 자주 하시곤 하는데, 평일에는 나와  대면할 시간이 거의 없으므로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많다. 그것을 두고 밍기는 할머니가 '과거로의 여행'을 하신다고 쓴 것이다. 그 글은 '할머니는 요즘 들어 과거로 여행을 더 자주, 많이 하신다'는 내용으로 끝맺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수시로 토해내는 옛날옛적 이야기를 밍기가 '과거로의 여행'으로 풀어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사실 나는 엄마가 아무때나 수십년 전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것을 듣기가 괴로웠다. 좋은 이야기도 자꾸 들으면 지겨운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머니(엄마의 시어머니)나 고모들, 작은아빠들 그리고 아빠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 엄마의 친정 식구들을 부양하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한없이 듣고 있노라면 내 영혼까지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그 일들이 종료된지가 언젠데, 이제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거의 없는데 언제까지 과거에 사로잡혀서 옆에 있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실 것인가 자주 생각했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마 밍기도 할머니의 그런 이야기를 꽤나 자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밍기는 그걸 '할머니가 과거로 여행을 한다'고 풀어냈다. 어릴 때부터 마음이 따뜻하고 세심한 녀석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담담하게 말하는 녀석 앞에서 나의 옹졸함이 새삼 부끄러웠다.


오는 6월에는 엄마, 그리고 언니와 엄마의 팔순 기념으로 꽤 오랜 기간 진짜 여행을 한다. 아마 그때도 엄마는 온전히 현재를 살지 못하고 무시로 과거에 불쑥 다녀오시겠지. 그렇게 되면 나도 한번쯤은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게 꼭 잡고 엄마의 과거로 함께 떠나봐야 하지 않을까. 엄마가 현재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도록 작은 등불을 하나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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